애니메이션 네 편에 대한 철학적 보고서… 그림 속에 숨은 정체성, 사회정의 문제를 논하다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 대해 물어보자. 재미있었다, 감동적이었다, 바닷속 장면이 아름다웠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어공주의 다리는 성적(性的)인 욕구를 상징한다”라든가 “미국식 해피앤딩을 만들려고 원작을 훼손했다”라며 몇몇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제시하는 철학적 화두는 무엇인가, <인어공주>라는 텍스트에 숨겨진 메시지는 무엇이고 그 논리적 허점은 무엇인지 인문과학적으로 분석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인문학자와 대중과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라이온 킹>, 너는 누구냐?
김용석 박사(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교수, 철학)의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푸른숲 펴냄, 1만5천원)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만화영화 비평집으로 분류하기 힘든 책이다. 애니메이션 네편만 갖고 200자 원고지 3천장 분량의 비평을 썼다면 그 우직한 분량만으로도 잡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여느 비평과 같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만화영화를 보고 이러이러한 것을 느꼈다”는 인상비평이 아니다. 이것은 철학과 대중문화 사이의 학제적 연구 보고서에 가깝다.
지은이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만화영화는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 <인어공주>다. 이 네 만화영화는 마구 고른 것이 아니다. 디즈니 만화영화 중에서 중세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산업사회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네 작품을 고른 것이다. 디즈니의 히트작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은 모두 “공주님과 왕자님의 행복한 사랑”이라는 중세적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네 작품에서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 사회정의의 문제 등 현대적 주제를 다루고 있어 이전 작품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 문제는 <라이온 킹>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라이온 킹>의 외적인 갈등은 동물의 제국을 차지하려는 숙부 스카와 제국의 후계자인 심바의 갈등이다. 그러나 내적인 갈등 역시 극심하다. 심바는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갈등한다. 심바의 고향은 프라이드 랜드, 즉 자존심의 땅이다. 어린 심바가 프라이드 랜드를 떠나서 정착하는 곳은 ‘하쿠나 마타타의 땅’이다. 그곳은 과거도, 욕망도, 의무도 없는 곳이다. ‘하쿠나 마타타의 땅’에서 사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벌레를 잡아먹으며 살 때 심바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자왕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버린 생활이었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숙명을 내포한다. 자신의 뿌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심바가 방황할 때, 주술사 원숭이 라피키가 심바와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너는 누구냐?” 라피키는 심바에게 묻는다. 여기서 심바는 “당신이 나의 아버지를 알았단 말이오?”라고 과거형으로 묻는다. 그러자 라피키는 “틀렸어, 나는 너의 아버지를 알고 있어”라며 현재형으로 대답한다.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는 심바 안에 살아 있기 때문에, 라피키는 “너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라고 현재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정체성의 본질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는 것임이 간접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작자는 여기서 라피키가 소크라테스적 질문을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풀어야 하는 가장 큰 질문- “나는 누구인가?”- 을 이 만화영화가 다루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철학적 분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작자는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대사 하나하나를 추적한다. 예를 들어 작자는 <알라딘>에서 알라딘은 “나를 믿어”라는 대사를 세번 반복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두번은 “나를 믿어?”라는 질문이고 한번은 “나를 믿어!”라는 명령이다. <알라딘>, 신뢰와 불신에 대한 고찰
신뢰와 불신이라는 주제는 <알라딘>에서 중요한 문제다. 마법사 자파는 겉으로는 술탄의 신임을 얻고 있지만 속으로는 술탄을 배신하고 있는 인물이며, 알라딘은 자스민 공주의 호감을 사고 있지만 자칫하면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는 가짜왕자다. 자파도 “나를 믿으라”고 이야기하고 알라딘도 “나를 믿어줘”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누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진실과 능력에 따른 것이다. 알라딘은 처음에 진실을 숨기고 가짜왕자 행세를 계속하려 했지만, 신뢰를 버리고 실리를 챙긴 결과로 차가운 얼음땅에 떨어진다. 알라딘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지니를 자유롭게 해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사랑하는 공주를 얻는다. 작자는 여기서 ‘신뢰’(trust)라는 말이 행위로 인해 검증되는 이런 구조가 시나리오 작가의 정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한다. 여기서 작자는 최근 새로이 부상하고 있는 수행능력과 신뢰의 관계를 짚고 넘어간다. 후기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능력과 신뢰의 관계는 중요한 사회적 화두가 되었고, 그 화두가 간접적으로 만화영화에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작자는 또한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에서 여주인공들이 디즈니의 중세적 틀을 깨는 인물임을 밝힌다. 바다 밑의 행복을 박차고 땅 위의 행복을 추구하는 에리얼이 신데렐라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벨 역시 책읽기를 즐기는 현대적인 미인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중세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악당 개스통은 “여자가 책을 읽는 건 좋지 않아! 이상한 발상을 갖게 되고 생각이 많아지니까”라고 말한다.
디즈니 만화영화 속에 숨은 이런 철학적 메시지들은 저자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자연스럽게 읽어낸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영화 속에는 탄탄한 철학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바탕이 필요하다.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콘텐츠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책 쓴 동기를 밝힌다. 따라서 이 책은 일차적으로 시나리오 작가나 문화상품 생산에 관련된 사람에게 유용한 책이다. 물론 좀더 깊이 만화영화를 감상하고픈 시청자 역시 읽어둘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차후 대중문화 비평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교과서로 삼을 만한 책이다. 작품으로서의 특징 연구, 장면 분석, 대본 분석 등 비평의 여러 방법론을 암암리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사진/<라이온킹>의 한장면. 주인공 심바는 자기 정체성과 개인성을 놓고 갈등한다.이는 곧 근대 서구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은이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만화영화는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 <인어공주>다. 이 네 만화영화는 마구 고른 것이 아니다. 디즈니 만화영화 중에서 중세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산업사회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네 작품을 고른 것이다. 디즈니의 히트작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은 모두 “공주님과 왕자님의 행복한 사랑”이라는 중세적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네 작품에서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 사회정의의 문제 등 현대적 주제를 다루고 있어 이전 작품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 문제는 <라이온 킹>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라이온 킹>의 외적인 갈등은 동물의 제국을 차지하려는 숙부 스카와 제국의 후계자인 심바의 갈등이다. 그러나 내적인 갈등 역시 극심하다. 심바는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갈등한다. 심바의 고향은 프라이드 랜드, 즉 자존심의 땅이다. 어린 심바가 프라이드 랜드를 떠나서 정착하는 곳은 ‘하쿠나 마타타의 땅’이다. 그곳은 과거도, 욕망도, 의무도 없는 곳이다. ‘하쿠나 마타타의 땅’에서 사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벌레를 잡아먹으며 살 때 심바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자왕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버린 생활이었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숙명을 내포한다. 자신의 뿌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심바가 방황할 때, 주술사 원숭이 라피키가 심바와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너는 누구냐?” 라피키는 심바에게 묻는다. 여기서 심바는 “당신이 나의 아버지를 알았단 말이오?”라고 과거형으로 묻는다. 그러자 라피키는 “틀렸어, 나는 너의 아버지를 알고 있어”라며 현재형으로 대답한다.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는 심바 안에 살아 있기 때문에, 라피키는 “너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라고 현재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정체성의 본질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는 것임이 간접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작자는 여기서 라피키가 소크라테스적 질문을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풀어야 하는 가장 큰 질문- “나는 누구인가?”- 을 이 만화영화가 다루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철학적 분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작자는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대사 하나하나를 추적한다. 예를 들어 작자는 <알라딘>에서 알라딘은 “나를 믿어”라는 대사를 세번 반복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두번은 “나를 믿어?”라는 질문이고 한번은 “나를 믿어!”라는 명령이다. <알라딘>, 신뢰와 불신에 대한 고찰

(사진/<알라딘>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신뢰'(trust)는 중요한 키워드다.신뢰를 요구하는 사람은 둘이지만 신뢰를 지키는 사람은 하나다)

(사진/<미녀와야수>의 벨은 전통적인 금발 미인이 아니다.이것은 디즈니가 중세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만화영화에서 근대적 사상을 가진 만화영화로 작품방향을 변화시켰음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