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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터프가이의 눈물이 맘을 흔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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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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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 누르고 떠오르는 ‘강한 남자’들… <쾌걸춘향> 엄태웅·<해신> 송일국은 왜 인기 있을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꽃들은 어디로 갔나? 그 많았던 꽃미남 말이다. 기억하는가? 21세기 벽두에 꽃미남 신드롬이 불었다. 뽀얀 피부에 착한 미모로 ‘누님’ 말 잘 들을 것 같은 꽃미남에 여성들이 환호한 적이 있다. 그 꽃들은 몇해도 못 가 시들어버렸다. 오직 꽃미남 강동원만이 “너 이러다 나한테 녹는다”라고 애교를 떨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 꽃들이 지면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남자 냄새다. 월드컵 열풍을 타고 ‘진짜 남자’ 김남일 바람이 일었고, 메트로섹슈얼 열풍이 이어졌다. 메트로섹슈얼은 소년의 얼굴에 청년의 몸을 갖춘 남성상이다. 옷 차림은 여성 못지않게 스타일리시하되 옷 안의 몸은 근육으로 단련돼 있어야 메트로섹슈얼에 낄 수 있다. 하지만 계속된 남성 이미지의 마초화는 소년의 얼굴마저 지워버렸다.

수염과 근육으로 ‘드레스 코드’ 하고


어느 날 우리의 왕자님들이 매끈한 얼굴에 터프한 수염을 기르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근육질의 몸매에 과묵한 성격까지 두루 갖추었다. <불새>의 에릭, <파리의 연인>의 이동건,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이 꽃미남의 과거를 버리고 강한 남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오죽하면 “남자배우, 뜨려면 지저분해져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겠는가? 과거의 이동건과 소지섭은 깔끔한 꽃미남 이미지를 대표하는 배우였다. 가수들도 질세라 남자가 되었다. 신화가 근육을 만들면서 인기에 불을 붙였고, god도 어느 날 근육질의 몸매로 나타났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취향은 ‘마초화’됐다. 이제 남자 연예인에게 근육은 꼭 갖추어야 할 ‘드레스 코드’가 됐다.

송일국(왼쪽 사진)과 엄태웅은 남성상의 변화를 상징한다. 강한 남성의 매력에 한국 사회가 빠져들고 있다.

요즘 ‘뜨는’ 남자배우인 <쾌걸 춘향>의 엄태웅과 <해신>의 송일국은 메트로섹슈얼을 넘어선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엄태웅은 뜨기 전 오디션 때 “군인 같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강한 남성성을 지녔다. 그는 드라마의 인기를 위해 <쾌걸 춘향>의 초반에 근육질의 몸매를 슬쩍 선보였다. 그가 연기하는 <쾌걸 춘향>의 변학도는 성격도 ‘남자’다. 변학도는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지만 춘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면모를 함께 지니고 있다. 물론 남자답게 과묵하다. 송일국이 맡은 <해신>의 염장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자다. 염장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평생의 경쟁자인 장보고를 죽이게 되는 비운의 운명을 타고났다. 그의 우수에 찬 눈빛과 쓸쓸한 표정, 과묵한 말투에 시청자들 특히 ‘아줌마’들이 넘어가고 있다. 염장과 변학도는 비록 악역이지만, 위기의 여주인공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는 ‘능력 있는’ 남자들이다. 두 사람은 ‘남자다운 악역’으로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 1, 2위를 다투는 인기를 얻고 있다. 조종흡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는 “극보수주의 부시 정권이 들어선 이래 전세계에서 강한 남성상이 복권되는 추세”라며 “한국에서도 IMF 경제위기로 가부장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부드러운 남성상이 떠올랐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강한 남성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적인 마초화 추세에 한국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조 교수는 “송일국의 이미지는 한국 사회가 7~8년 동안 잊고 있었던 강한 남성 이미지의 복원을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새로 등장한 강한 남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꽃미남이 터프가이로 변신한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근육과 수염은 변신을 상징하는 코드다. <파리의 연인>의 이동건은 이런 변신을 드라마 속에서 고스란히 재현했다.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는 “이동건이 박신양과 김정은을 두고 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바뀌었다”며 “수염은 이동건이 폭력성을 선택했음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털은 남성성의 상징이다. <발리에서 생긴 일>까지만 해도 매끈한 외모를 자랑했던 소지섭도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수염을 기른 반항기 넘치는 ‘양아치’ 이미지로 변신했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조인성의 인기에 가렸던 소지섭은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이미지 변신을 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반듯한 귀공자 스타일의 대명사였던 류진도 현재 방영 중인 <세잎 클로버>에서 로커 스타일의 파격적인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스타일은 연예인의 이미지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느새 짧은 머리에 거칠한 수염은 젊은 남성들의 고전적인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이동건은 <파리의 연인>에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남자’ 로 거듭났다.

최근의 강한 남자들은 전통적인 가부장 마초 이미지와 다르다. 단순한 마초 이미지는 희화될 뿐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초 이미지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강한 남성들은 부드러운 마초, 눈물로 무장한 마초들이다. 항상 사랑을 얻지 못하거나 경쟁에서 지는 비운의 운명을 타고났다. 어딘가 ‘취약점’을 가진 마초들이다. 터프가이들이 ‘한 떨기’ 눈물을 보일 때, 시청자들의 연민은 배가 된다. 동정심은 넘쳐난다. 염장이 사랑하는 여인 정화(수애)에게 “나를 이용하셔도 좋습니다”라고 한마디 던지자 시청자들은 ‘뒤집어졌다’. 마초 근성을 가리고 연민을 끌어내는 남자의 눈물은 위험하다. 눈물로 포장된 마초는 비난 대신 동정을 얻는다. 조종흡 교수는 “부드러운 남성상만을 제시했을 때 잃어버리는 시장이 분명히 있다”며 “겉은 터프하지만 속내는 여린 남성상을 재현함으로써 전통적인 남성상과 부드러운 남성상의 두 시장을 한꺼번에 얻으려는 연예산업의 전략이 녹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가부장의 권위가 조금 무너졌지만 여전히 강고해서 마초성만을 내세울 수도, 연약한 남성상만을 제시할 수도 없는 모순적인 상황”이라며 “남성의 모순된 몸뚱어리에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모순적 현실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가부장 마초 아닙니다”… 모순의 몸뚱어리?

예전보다 더 많이 방영되고,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사극과 시대극에서는 강한 남성의 이미지가 더욱 도드라진다. 재벌들의 영웅담을 다룬 <영웅시대>가 인기를 끌었고, <불멸의 이순신>이 만만치 않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시대극과 사극의 인기에는 한국 역사에서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다. 미국 대중문화가 팍스 아메리카나가 완성된 1950년대를 끊임없이 그리운 시대로 추억하듯이, 한국 연예산업은 경제개발의 1970년대를 좋았던 시절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른바 ‘조국 근대화’의 주역은 남성이었다고 기억되고, 남성성에 대한 향수도 강화된다. 게다가 1990년대 시작된 여성주의 등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때 이른 ‘반동’도 강한 남성의 복고에 한몫 거든다.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강한 남성은 각광받고 있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주인공인 강력계 형사와 검사는 남성성의 복고를 대표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공공의 적>의 흥행에는 제대로 된 국가 권력, 제대로 된 남성성의 품에 한번 푹 빠져보고 싶다는 퇴행적 심리가 들어 있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과잉된 남성성을 극복할 대안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남성성으로 후퇴하고 있다. 나아가 강한 남성성은 정치적 우경화의 징후로 해석되기도 한다. 레이건과 함께 람보가 등장했다. 지금 한국도 남성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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