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축 <모형 속을 걷다>
▣ 김학량/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작가
모형 속을 걷는다? 아니, 어찌하여 하필 ‘모형’인고? 무슨 애절한 사연이 있어 모형 속을 걷는고? 세간에 횡행하는 건축서들처럼 ‘삐까번쩍한’ 작품을 뒷짐 지고 안내할 수도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모형인고? 알고 보니 작업실 옮기느라고 쌓여 있던 모형을 솔거할 수 없어, 장례 삼아 사진 찍어두고 거기에 바친 진혼곡이었다. <모형 속을 걷다>(이일훈 지음, 솔출판사 펴냄)는 모형을 건축가의 ‘꿈의 공간’이라고 일컫고, 자신의 모형이 머금고 있는 건축의 꿈과 공간을 더듬으며 자신의 작업을 엄정하게 성찰해간다.
우리가 품은, 건축에 대한 사회적 기억은 무엇일까. 인생 역정에 따라 가지각색이겠지만, 비교적 공통항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성수대교·달동네·아파트·다가구주택·삼풍백화점·63빌딩·신작로·새마을운동·국도변 농촌주택 들이 있겠다. ‘전통’에 어설피 눈돌려본다면 부석사 같은 유서 깊은 사찰이 나타날 수 있겠고.
그런데 이런 사회적 기억들은 헤아려보면 대체로 ‘조국 근대화’ 과정이나 그 부산물로서 나타나고 또 그 정치경제적 상상력 및 동력과 나란히 발맞추어 행진한 자본들, 그 전후좌우에 된소리 한번 못 내고 도시의 그늘로 은폐된 숱한 민생(민심)과 엮이지 않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비약하건대, 우리 건축에 무슨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근대화·모더니티·모더니즘의 문제와 떨어뜨려놓고 볼 수 없겠다. 우리 사회는 정치역학과 자본의 길에 내몰려 그저 집을, 건물을, ‘삘’을 지어대기에 바빴던 것 같다. 새로 짓는 자리마다 그 터를 이루던 환경과 민생과 민심과 역사, 그 모든 살림살이의 네트워크는 전이와 재생의 방도를 꾀할 겨를도 없이 허물어지고 우리는 이웃에게 점점 더 낯선 ‘오브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건축은 살림살이의 역동적 짜임새와 자연스러운 교유의 그물을 해체하는 길로만 자신의 영역을 건축하지 않았는지. 지은이는 낯 붉히지 않고서 그저 ‘건축은 삶’일 따름이라고 여러 차례 짚고 또 되짚는다. 연단에서 강의하듯 하지 않고, 교외의 어느 야트막한 언덕길을 걷다가 길섶에 나란히 퍼질러 앉아 바람 쐬고 구름 바라고 풀 어루만져가며 그냥 평상의 호흡으로 이야기하듯, 자신의 체험에서 한치도 바깥으로 빠지지 않고서 덤덤하게 말을 건넨다. 그의 말은 그의 건축의 재료다. 형이상학적 수사의 지뢰밭으로 건축을 몰아넣지 않고서, 건축을 구경거리로 둔갑시키지 않고서, 그는 어떤 기정사실로서의 건축 이전에, 건축과 함께 나·너·그·우리·그들이 살피고 고려해야 할 삶의 가치를 묻고 있다. 그의 건축방법론으로 알려진 ‘채나눔’이 지향하는 바도, 무엇을·어떻게 지을 것인가 하고 성마르게 묻는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 자문하고 궁리한 끝에 나온 대안이다. 우리 모더니즘이 밀어붙인 집단·총화·단결 같은 구호들이 재현하는 삶의 방식과 속도 대신에, 그는 ‘불편하게 살자’ ‘바깥에서 살자’ ‘늘려 살자’고 제안한다. 다시, 건축은 왜 하는가. 그에게 기대어 헤아리자면, 건축은 살림살이의 그릇이며 마음을 담는 공간이다. 그러니 집은 꼴보다도 ‘결’이어야 하겠다. 다시, 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을 차분히 성찰하는, 다만 하나의 매체에 지나지 않겠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기억들은 헤아려보면 대체로 ‘조국 근대화’ 과정이나 그 부산물로서 나타나고 또 그 정치경제적 상상력 및 동력과 나란히 발맞추어 행진한 자본들, 그 전후좌우에 된소리 한번 못 내고 도시의 그늘로 은폐된 숱한 민생(민심)과 엮이지 않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비약하건대, 우리 건축에 무슨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근대화·모더니티·모더니즘의 문제와 떨어뜨려놓고 볼 수 없겠다. 우리 사회는 정치역학과 자본의 길에 내몰려 그저 집을, 건물을, ‘삘’을 지어대기에 바빴던 것 같다. 새로 짓는 자리마다 그 터를 이루던 환경과 민생과 민심과 역사, 그 모든 살림살이의 네트워크는 전이와 재생의 방도를 꾀할 겨를도 없이 허물어지고 우리는 이웃에게 점점 더 낯선 ‘오브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건축은 살림살이의 역동적 짜임새와 자연스러운 교유의 그물을 해체하는 길로만 자신의 영역을 건축하지 않았는지. 지은이는 낯 붉히지 않고서 그저 ‘건축은 삶’일 따름이라고 여러 차례 짚고 또 되짚는다. 연단에서 강의하듯 하지 않고, 교외의 어느 야트막한 언덕길을 걷다가 길섶에 나란히 퍼질러 앉아 바람 쐬고 구름 바라고 풀 어루만져가며 그냥 평상의 호흡으로 이야기하듯, 자신의 체험에서 한치도 바깥으로 빠지지 않고서 덤덤하게 말을 건넨다. 그의 말은 그의 건축의 재료다. 형이상학적 수사의 지뢰밭으로 건축을 몰아넣지 않고서, 건축을 구경거리로 둔갑시키지 않고서, 그는 어떤 기정사실로서의 건축 이전에, 건축과 함께 나·너·그·우리·그들이 살피고 고려해야 할 삶의 가치를 묻고 있다. 그의 건축방법론으로 알려진 ‘채나눔’이 지향하는 바도, 무엇을·어떻게 지을 것인가 하고 성마르게 묻는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 자문하고 궁리한 끝에 나온 대안이다. 우리 모더니즘이 밀어붙인 집단·총화·단결 같은 구호들이 재현하는 삶의 방식과 속도 대신에, 그는 ‘불편하게 살자’ ‘바깥에서 살자’ ‘늘려 살자’고 제안한다. 다시, 건축은 왜 하는가. 그에게 기대어 헤아리자면, 건축은 살림살이의 그릇이며 마음을 담는 공간이다. 그러니 집은 꼴보다도 ‘결’이어야 하겠다. 다시, 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을 차분히 성찰하는, 다만 하나의 매체에 지나지 않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