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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눈물도 간직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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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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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하고 쓸쓸하기조차한 <불후의 명작> 인기역을 선택한 박중훈의 모험은 성공할까

박중훈이 돌아왔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1년6개월. 부지런한 배우라도 일년에 두편 출연하기 빠듯한 영화판에서 1년 반의 빈칸이란 공백이라 부르기 옹색한 시간이지만 돌아왔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한국영화가 만개하고 젊은 배우들이 스크린을 점령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비운 자리는 그만큼 넓었다는 것일까.

“밥 한술 뜨는 기분으로”

박중훈표 영화라는 말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 <투캅스>(1993)로 또렷이 새겨진 배우 박중훈의 이미지가 <마누라 죽이기>(1996), <깡패수업>(1997), <할렐루야>(1997)로 이어지면서 그저 카메라가 박중훈의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 ‘영화가 되던’ 90년대 중반, 박중훈은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도 영화를 선택하게 하는 보증수표였다. 그 절정기인 97년에는 네편이라는 경이로운 숫자의 ‘박중훈표’ 영화를 띄워올렸던 그가 이후 1년 반 만에 박중훈표 표라기보다는 이명세표인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등장하고, 또 1년 반이 지나서야 새 작품을 선보였으니 박중훈표를 그리워하는 관객에게 ‘돌아왔다’는 건 그리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불후의 명작>. 그렇다면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작품에서 우리는 4년 만에 박중훈표 영화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아마도 관객의 반은 동그라미표를 들 것이고, 나머지 반은 가위표를 들 것 같다. 머리는 ‘불후의 명작’을 그리고 있지만 몸은 에로영화판을 전전하는 감독 지망생 인기. 많은 인생이 그렇듯 순결한 이상과 남루한 현실 사이에서 허덕이는 인기는 분명 “좌충우돌 코미디”와 “끈적끈적한 액션” 사이를 오가던 박중훈표의 캐릭터에 비하면 싱겁고 심심하다. <불후의 명작>에서 박중훈은 “이래도 안 웃을래”라고 벼르기는커녕 “나도 지쳤어”라고 중얼거리는 것처럼 느슨하고 쓸쓸하기조차 하다.

“반찬이 아무리 맛있어도 반찬만 먹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기 역시 하나의 얼굴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저의 모습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불후의 명작>은 밥 한술 맛있게 뜨는 기분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후의 명작>이 연기변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웃음과 눈물, 좌절과 희망을 한 그릇에 담고 있는 게 인생이고 배우의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일진대 쓸쓸함과 소시민적 절망 역시 “관객에게는 낯설지만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배우 박중훈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말한다. 연기를 배우의 경험이나 사적인 삶과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연기변신이라는 단어를 믿지 않는 박씨에게 길가다 흔히 부딪칠 수 있는 익명의 누군가 중 하나인 ‘인기’는 오히려 이전의 어떤 역할보다도 그에게 ‘맞는 옷’이었을지 모른다.

“심상진 감독의 유일한 요구는 힘을 빼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거였어요. 저의 가장 편안하고 선한 얼굴을 꺼내고 싶다는 것이 심 감독의 희망사항이기도 했구요. 덕분에 다른 배우들보다 좀 여유있게 촬영을 하는 특혜 아닌 특혜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시도가 ‘리스크’를 안고 있는 모험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입장료 6천원을 박중훈이 터뜨려주는 웃음의 뇌관과 기꺼이 맞바꾸던 관객은 ‘신통치 않은 뇌관’을 준비했다는 원망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 역시 90년대 중반 <불후의 명작> 시나리오를 집어들었다면 지금처럼 매혹됐더라도 선뜻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연기 자체에 대한 부피감이 커져

(사진/영화 <불후의 명작>.)
“<투캅스>로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내 영역을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인기배우로 자리를 잡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늘 다음 작품을 염두해 두니까 흥행에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을 때였습니다. 결과는 아주 좋았지요.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저를 보면서 즐거워했으니까요. 행운아였던 셈이죠.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작품의 결과보다는 ‘연기’ 그 자체가 가지는 부피감이 점점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인기나 수입처럼 나를 인정하는 외부적 가치들에 대한 집착은 옅어지는 반면 연기에 대한 집착의 농도는 더 진해져요. 배우활동에 대한 동기가 더 단순명쾌해진다고 할까요. 한쪽으로는 쉽고 편해지는 반면 한쪽으로는 더 힘들어지는 거죠.”

<불후의 명작>은 확실히 <마누라 죽이기>나 <할렐루야>식 박중훈표 영화들과는 다르지만 이 영화에서 박중훈의 존재감은 작지 않다. 바로 눈앞에서 서슴없이 치부를 드러내는 여배우를 볼 때 아찔해하거나, 후배에게 빌린 고물차를 타고 여경(송윤아)과 드라이브하다가 차주인의 가족사진을 보고 당황하는 박중훈의 ‘본능적’인 표정연기는 밑도 끝도 없이 칙칙해지려는 ‘인기’를 순간순간 햇살 아래로 갖다놓는다.

“아마 인기 역을 다른 배우가 했더라면 더 처량해보이고 어긋난 로맨스도 눈물을 쏙 빼놓을 수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박중훈이라는 배우를 아무리 우울한 자리에 앉혀놔도 튀어나오는 밝음이나 웃음을 통해서 ‘절망 속의 희망’을 찾으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다고 생각해요.” 박중훈은 아름다운 로맨스의 주인공이나 절망 속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이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냈다. ‘변신론’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이 찾아야 할 자리를 정확히 찾을 줄 안다. 예를 들어 그는 임권택 감독과 함께 영화를 하고 싶다고 드러내놓고 말하지만 <춘향전>의 이몽룡이나, <길소뜸>의 신성일이 아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의 작품 속 인물”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최근 크랭크인에 들어간 김성홍 감독의 <세이예스>는 본격 스릴러물이지만 여기서 박중훈이 맡은 사이코 킬러는 최민수나 차승원이 했던(또는 시도했던) 정통 사이코 킬러와는 다른, 웃음이 묻어나오는 인물을 될 것이다.

배우, 양극단에서 위태로운

스스로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에 불안한 만큼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박중훈은 관객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행여 관객의 외면과 평단의 혹평이 그를 때리더라도 심하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대박이 된다 해도 찬사 속에 파묻히지도 않을 듯싶다. 그것은 16년의 연기생활이 그에게 가져다준 단련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우와 자연인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찾아내는 박씨의 명석함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목수에게는 완성된 집이 노력의 결정체이지만 배우는 몸자체가 자신의 생산물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긴장하지 않으면 객관성을 잃기 쉽고 희망을 현실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먹고사는 직업이다보니 한번 자아도취에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는 거지요.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에서 40∼50% 정도를 잘라 내면 아마도 남들이 평가하는 제가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 “양극단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배우의 운명”이라고 말하고 “관객이 나를 버릴 때까지 남아서 연기하는 것은 결례”라고 말하지만 박중훈은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다. 줄타기마저 농담을 터뜨리며 즐길 수 있는 숙명적 에너지와 10여년 배우생활의 연륜이 화학적 작용을 일으킨 결과일 것이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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