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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KBO 북치고, 구단 장구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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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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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방해 속에 치러진 선수협 정기총회…선수들 내분 겹친 추운 겨울

(사진/지난 3월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선수협의회 사태의 중재를 요청하러 찾아온 강병규선수(맨 오른쪽)와 악수하고 있다)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저 고삐없는 열정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운동을 직업으로 가진 자의 당연한 권리 요구’라고 말한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이하 선수협). 1년 전 선수협의 출범은 프로야구 선수들 자신에게도 다소 충격적인 동시에 생소하게 다가왔다. 출범한 지 18년이 넘는 국내 최고의 프로 스포츠인 프로야구는 최근 몇년간 그 위상과 시장 자체가 축소돼왔던 것이 사실이다. IMF와 걸출한 스타들의 해외 진출, 외국인 선수의 등장 등으로 인해 한국 프로야구는 간헐적인 성장통을 앓아왔다. 이미 지난 88년 출발했으나 초기에 진압당해 그 흔적조차 없어졌던 선수협이 11년 뒤 재가동하면서 선수들 자신에게 성장통의 처방전을 제시한 셈이다.

선수들 뜯어놓은 겨울 스케줄

지난 겨울을 뜨겁게 달궜던 선수협 정국은 한마디로 희망과 불안 그 자체였다. 자정을 꼬박 넘기면서 강행된 총회는 구단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결국 출범을 선언했고 이후 거리시위를 하면서까지 정당성을 호소하고 나섰다. 결국 시즌 종료 뒤 선수협의 확대 재구성을 논의하자며 문화관광부 중재로 ‘눈가리고 아옹’식으로 지나갔지만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다. 그리고 올 겨울 다시 선수협쪽과 구단쪽은 팽팽하게 맞서며 대립하고 있다.


올 겨울 다시 불거진 이 문제를 놓고 양쪽이 첨예하게 맞서는 부분은 다시 선수협의 인정 여부다. 8개 구단 사장들로 대표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아직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양상은 총회 개최가 벌써 몇 차례 연기되면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O와 8개 구단의 반대 속에서 결국 선수협 제2기가 출범했다. 지난 12월18일 올림픽파크텔에서 23명의 선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기총회를 열고 회장에 송진우 회장을 재선임한 것이다.선수협은 이른 시일 안에 문화관광부에 사단법인 설립신고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KBO와 8개 구단이 일부 선수로 구성된 선수협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마찰이 예상된다.

겉으로만 보면 선수들끼리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아 시간과 날짜, 쉽게 장소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딴판이다. 1년 전과 똑같이 구단의 철저한 반대 속에 내몰려 있는 형편이다. 다만 1년 전에는 주축 선수들의 준비과정이 비밀리에 진행된 덕에 구단들이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으나 이번에는 시간도 충분했다. 선수들이 선수협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구단의 방해를 막아내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기엔 6개월이란 공백이 너무 컸다. 한번 달궈졌던 장작불을 다시 지피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닌 모습이다.

구단들은 애초부터 선수들의 스크럼을 죽죽 찢어놓는 겨울 스케줄을 만들었다. ‘총재구단’ 두산은 일찌감치 주전들을 일본 돗토리현으로 보내 겨울 마무리 훈련을 받게 했다. 예년 같으면 이듬해 2월께나 떠나야 하는 전지훈련의 전초전격인 마무리 훈련을 이처럼 해외에서 실시하는 이유는 뻔하다. 선수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현행 야구선수 계약서상에는 ‘선수의 2월1일부터 11월30일까지 사이의 참가활동에 대한 보수로서 일금(연봉)을 지불하는 것’(야구선수계약서 제3조 참가활동보수)으로 돼 있다. 즉, 12월과 1월에는 계약의 목적인 ‘프로야구 선수로서 특수기능에 의한 활동’을 구단을 위해 행하지 않아도 된다. 참가활동 기간이 끝난 선수들에게 또다시 훈련을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불법인 셈이다. 구단쪽에서는 신예 및 재활 선수들을 위해서 마무리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요하면서도 실제 마무리 훈련에 주전들을 대부분 참가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KBO와 구단쪽이 선수협의 재출범을 원치 않는 데는 제도상의 이유도 있다. 선수협 총회가 다시 개최될 경우 회원 가입과 회장 선출에 이어 사단법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에 이어 프로야구에 두 번째 사단법인이 생기고, 그들과 동등해지지 않을까라는 우려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수협 총회도 아닌, 사전 준비모임격인 8개구단 선수대표자회의는 각 구단의 방해와 KBO의 일방적인 조처로 두 차례나 무산됐다. 지난 11월 대표자회의를 보류선수 명단이 확정·발표되는 11월30일 이후로 연기하라고 통보했던 KBO는 12월8일로 예정됐던 대표자회의도 11일 골든글러브 시상식 이후로 연기하지 않을 경우 주장들의 참여를 막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가담 선수들 옷벗는 상황에서…

(사진/선수협의회 총회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각 구단 선수대표들)
KBO가 북을 치기에 앞서 구단들은 장구를 들고 나서 이미 정지작업을 해놓았다. 두산 베어스 소속 한 선수의 말을 들어보자. “현재 우리 팀 분위기는 선수협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지난해 적극 가담했던 선수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보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강병규가 SK로 트레이드된 뒤 옷을 벗었고 비주전급인 한명윤, 함석원 등은 자유계약 선수로 풀렸다. 가장 적극적으로 선수협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박명환도 다소 회의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런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주전들의 경우 외야수 심정수 정도가 선수협에 동조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나 주전 중 가장 어린 선수에 불과하다. 스포츠계의 끈끈한 선후배 관계는 이럴 때 악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선수협을 통해 인생의 행로를 바꾼 송진우(한화) 선수협 회장. 그를 배출한 한화 이글스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화는 지난해 이희수 전임감독이 선수협 총회 참석차 떠나는 버스 앞에 드러누워 “차라리 나를 밟고 떠나라”는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올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8개구단 주장모임이 있던 지난 12월15일에 앞서 구단쪽은 송진우를 불러 면담을 가장한, 사실상의 선수협 포기를 요구했다. 물론 구단의 설득은 그다지 잘 먹혀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해 내내 선수협의 정당성을 호소하며 선수협파의 구심점으로 활약해온 대표를 단 한 차례의 면담으로 설득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 구단쪽의 계산은 순진해보이기까지 한다. 자율야구의 대명사 이광환 신임감독이 부임한 이후 현재 한화는 코치들과 선수 3∼5명씩 조를 이뤄 온천, 콘도 휴양지 등으로 워크숍 형식의 외유를 자주 가고 있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실시된 이러한 모임에 대해 선수들과 송진우 선수협 회장은 어느 정도 동조는 하면서도 이러한 외유가 악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잔뜩 경계하고 있다.

재벌구단 삼성과 현대는 최근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을 한껏 이용해 선수들에게 유·무형의 압박을 가하며 선수협 출범을 결사적으로 막아왔다. 이미 지난해 총회에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여온 두팀에서는 올해도 선수협에 참가하는 선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는 이미 사전모임을 통해 ‘참가하지 않는 것’으로 의견 통일을 본 상태다. “노조(선수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사장단에서는 노조로 판단하고 있다)가 생기면 프로야구를 그만 두겠다”는 폭언을 자주 내뱉어온 삼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LG는 괌 훈련 뒤 귀국일정을 18일 총회 날짜에서 갑자기 뒤로 늦췄다.

지난 겨울과는 뭔가 다르다

(사진/지난 1월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치른 창립총회)
지난 15일 8개구단 주장모임에서 불거졌듯이 선수협 총회 강행파와 ‘총회를 하지 않을 경우 선수협의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KBO의 제안을 인정하자는 주장이 엇갈렸다. 한화, 롯데, LG가 총회를 통해 선수협의 사단법인을 주창한 반면 나머지 구단은 이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지난 18일 선수협총회에는 등록선수 425명 가운데 23명만이 참석, 지난해 창립총회 때 모인 75명에 비해 크게 줄었다. 분명한 것은 지난 겨울과 달리 선수들 사이에 일종의 두려움이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1년간 선수협 활동에 우호적인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들 사이의 분열된 모습은 더욱 드러나고 있다. 즉, 잘하는 선수들은 총회에 참가해도 어쩌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은 총회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신변에 커다란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여기는 형국이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데 누구보다 익숙한 야구선수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선수협 파국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성원/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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