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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모피, 희생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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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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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자칭 동물애호가이면서 밍크 목도리에 볼을 비비는 난 기회주의자였나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사진/ Rex Features)

몇번 더 해보겠다고, 좀더 길게 해보겠다고 사슴 모가지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먹거나 가두어놓은 곰의 쓸개를 조금씩 파먹는 남자들을 세상에서 제일 혐오한다. 정말이지 뉴스에서 보신용으로 희생당하는 야생동물들 소식을 들을 때만큼 인간에게 치가 떨리는 때가 없었다. 말하자면 나도 동물애호가다. 브리지트 바르도만큼 분별력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개와 우정을 나누고 코끼리의 신비와 늑대의 야생성을 사랑하는 동물애호가다.

그런데 최근에 내 자신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알게 됐다. 난 그저 기회주의자일 뿐이었다. 때에 따라 진보와 보수, 아날로그와 디지털, 선과 악, 정신과 육체, 자연과 문명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약삭빠른 기회주의자. 이번 겨울 모피에의 유혹에 빠져, 부드러운 밍크 목도리에 볼을 비비는 내 자신을 보며 그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그 시즌 트렌드에 맞게 다양한 종류의 모피들이 선보이지만 이번 시즌만큼 유혹적인 때는 없었다. <바자>에 소개된 너구리 목도리와 러시안 장교를 연상케 하는 블랙 토끼털 코트, 그리고 귀여운 밍크 볼레로를 황홀한 듯 바라보는 자칭 동물애호가의 모순이라니…. 그러나 <일다>라는 웹진에 실린 ‘모피, 취향이라는 이름의 살육’이라는 기사를 보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말았다. 그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동물보호단체 ‘윤리적으로 동물 대하기’(PETA)에 따르면 밍크, 너구리, 토끼, 친칠라, 여우 등의 동물은 죽을 때까지 0.5㎤ 정도의 좁은 우리 안에서 갇혀 지낸다. 주로 사육의 편리함을 위해서이지만 밍크의 경우 움직임을 최소로 해야 털이 부드럽다는 것이 이유가 된다.”

그 때문에 모피를 즐겨 사용하는 디자이너들은 동물단체의 제지를 당하기도 하고(동물애호가들이 쇼장에 잠입해서 페인트를 뿌리는 등의 소동), 인격적 비난을 당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칼 라거펠트는 언젠가 이런 변을 했다. “모피 사용을 중단하라는 동물애호가들의 주장은 모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무서운 말인지도 모른다. 모피는 울이나 실크와 마찬가지로 소재일 뿐이다.”

스텔라 매카트니처럼 모피로 옷을 만들지 않기로 유명한 디자이너들도 있지만 세상에는 아름다운 헤어를 가진 동물들을 그저 좋은 소재로 생각하는 디자이너들이 더 많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의 멋진 감각으로 포장된 모피는 아름다울뿐더러 귀하기 때문에 더욱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번식 능력이 없어서 양식이 안 되는 호모 사파이어 밍크가 그토록 비싼 이유도 그 희소성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 밀렵꾼들은 그 귀한 것들을 총으로 잡는다. 그런 면에서 아름답고 귀한 모피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다.

한편 요즘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질됐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와일드: 야생의 패션’전을 통해 퍼와 깃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는데, 그 전시의 큐레이터는 이런 말을 했다. “경제적 연관성을 떠나, 모피는 섹슈얼하면서도 충동적인 투자다. 프로이트에게 모피는 음모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어떤 중세 기사는 사모하는 귀부인의 음모 한 올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비록 빌린 것이긴 하나 밍크 한 마리를 죽여서 만든 숄을 두르고 파티장에 나가 교태를 부렸다. 당시엔 그저 앞가슴이 많이 파인 옷을 입기 위해 섹시한 숄이 필요한 것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여자의 교태를 위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생긴 사랑스러운 밍크들이 희생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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