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출판] 영화, 신화, 무의식

543
등록 : 2005-01-12 00:00 수정 : 2008-09-17 19:09

크게 작게

<신화와 영화>를 통해 다시 보는 영화 속 신화적 모티브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어떤 장르의 영토 안에서 이른바 ‘전문가’들이 겹겹의 방벽을 쳐놓고 해석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장르의 죽음을 뜻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살아 있는 장르다. 각양각색의 ‘싸움꾼’들이 영화 안에서 치고받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행복하다. 물론 좀 시끄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화와 영화>(강대진 지음, 작은이야기 펴냄)는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오는 영화 에세이 중에서도 인상적인 책이다. 우선 서양고전학자인 지은이의 구수한 입담이 즐겁다. “보통 학계에서 요구하는 글들에는 엄밀한 입증이 필요하고… 계속 그런 글들만 쓰다 보니 좀 심통이 났다.” ‘심통이 난’ 지은이는 이 ‘잡문’들을 일기를 쓰듯 자유분방하게 펼쳐나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몇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집이 나왔다는 둥 딴 길로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신화와 서양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을 대중적인 영화의 밑바닥에서 건져내고 있다는 점이다.


신화는 고대 인류가 꾸어온 꿈이다. 영화는 근대 인류가 꾸고 있는 꿈이다. 책은 두개의 꿈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의 동형구조를 잡아낸다. 지은이에 따르면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는 <오딧세이아>처럼 영웅의 하계여행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라는 이름의 지옥을 드러내고 있다. 윌라드는 저승을 향해 나아간다. 여행 중에 그는 오딧세우스를 유혹하던 세이레네스처럼 위문 쇼 무대에 나타난 <플레이보이> 모델들과 만난다. 그리고 안개가 가르고 있는 두개의 저승을 지난다. 하나는 ‘좋은’ 저승, 또 하나는 ‘나쁜’ 저승. 그리하여 만나게 되는 저승의 왕(커츠 대령)은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주는 신화 속의 왕들과 같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신화를 비틀기 시작하는데, 보통 왕의 희생 뒤에 따르는 땅의 회복은 없고, 지옥은 여전히 지옥일 뿐이다.

<페이스 오프>에는 자신을 입증하는 것, 즉 신화 속 ‘알아보기’의 장치들이 등장한다. <오딧세이아>에서 오딧세우스는 흉터, 브로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억’으로 아내 페넬로페에게 자신을 증명한다. 마찬가지로 <페이스 오프>의 영웅은 외적 증거인 흉터와 반지, 그리고 내적 증거인 혈액형과 기억으로 온갖 고난을 물리치고 자신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영웅은 한 차원 위의 존재로 고양된다.

마찬가지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저승여행에 대한 신화 속 모티브들이 현란하게 영화에 대입된다. 특히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마법적인 장비들의 신화적 기원이 재미있다. ‘절대 반지’는 희랍 신화에서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하는 ‘귀게스의 반지’나 ‘하데스의 모자’, 혹은 오딧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에게 받은 반지를 떠올리게 한다. 프로도가 받은 사슬 갑옷은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비교된다. 아라곤의 칼은 저승의 존재들로부터 주인을 지켜준다는 점에서 오딧세우스의 칼을, 주인의 신분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테세우스의 칼을 연상시킨다.

역사학자의 눈에는 역사만, 신화학자의 눈에는 신화만 보인다. 혹시 이런 신화적 분석은 지은이의 ‘오버’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 대한 지은이의 변명. “단언하건대, 감독이라 할지라도 영화의 해석에서 나보다 더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이 옳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