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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생활만화] ‘명랑가정’의 툭탁툭탁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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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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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인기몰이하는 ‘생활만화’들… <반쪽이…>에서 진화한 <비빔툰> <또디> 등에 건강한 일상 담겨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최하예린(16)양은 새로운 교과서를 받고 깜짝 놀랐다. <생활국어> 교과서 ‘쉼터’란에 자신이 등장하는 만화가 실렸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기억도 언뜻 떠올랐다. 당시 하예린은 아빠에게 피아노 연주를 ‘지도’했다. 그것을 아빠 최정현(45)씨가 만화로 그렸던 것이다. 때로는 아빠가 그리는 만화에 대해 “사생활 침해”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마치 친구를 초대하려고 부모의 외출을 ‘강요’하는 딸로 비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교과서를 받은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에 반쪽이 만화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즐겁기만 했다.

장편 만화 언저리에서 ‘주류’로


만화가 최정현씨의 <반쪽이의 육아일기>는 하예린이 태어난 직후인 1990년 6월 시작됐다. 그러니까 하예린의 나이만큼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서울대 미대를 다니며 대학신문에 만평을 연재한 뒤로 시사만화와 지하 유인물에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던 만화가의 일대 변신이었다. 처음엔 “남자가 그 짓이냐”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경상도에 거주하는 일가친척들에겐 반쪽이의 실체를 오롯이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최씨는 15년 동안 반쪽이를 이어오며 생활만화를 주류의 대열에 합류시켰다. 요즘은 반쪽이의 빈자리를 후배 작가들에게 맡기고 ‘만화조각’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생활만화는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각광받는 '야오네집' <비빔툰>의 모델인 홍승수씨 가족, 만화에세이 <오리의 기도>의 한 장면(맨 왼쪽부터).

사실 반쪽이에서 비롯된 생활만화는 오랫동안 장편 스토리 만화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소박한 일상에 자잘한 재미를 덧입혀도 만화적 상상력에서 나오는 기발한 반전의 묘미가 확연히 살아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후반에 순정만화가 김지윤(39)씨가 <화이트>에 장편 를 연재하면서 장편 생활만화의 가능성을 보였다. 철없던 연인 수진이와 종민이가 쌍둥이 부모로 등장해 아이를 키우면서 악전고투 속에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과정을 담은 것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작가의 육아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이 작품은 현실적인 소재로 순정만화에 옹골진 감동을 새겼다.

이렇게 장편만화에 육아 경험이 영향을 끼치면서 생활만화의 폭이 넓어졌다. 당연히 아이와 가정이라는 육아만화의 공식에도 균열이 생겼다. 김지윤씨의 가 생명을 낳고 키우는 과정을 ‘축복’이라는 가정 드라마로 엮어냈다면, 신영우(35)씨의 <키드갱>은 조직폭력배와 육아를 각종 유행 코드로 버무린 사회 코미디물이다. 가정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만화로 표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아이가 세상살이에 일일이 개입하는 양상을 판타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조직폭력배들이 유괴한 얼짱 신생아 철수를 키우는 과정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시간대별로 구성한 이 작품에도 아빠의 정서가 곳곳에 배어 있다.

하지만 신영우씨의 <키드갱>에서 육아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젖먹이 철수가 세살배기로 컸지만 육아법은 양념처럼 나올 뿐이다. 애당초 <키드갱>은 육아와는 무관하게 시작됐다. 신씨는 연재 1년 뒤에야 딸을 얻었지만 직접 키우기 어려운 처지였다. 부인 신시하씨 역시 순정만화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름의 육아 경험은 만화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아이를 갖기 전까지는 철수가 만화적 캐릭터일 뿐이었다. 그런데 딸을 키우다 보니 일상의 깨달음이 많이 생겼다. 육아를 전담하지 못한 아쉬움은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부인이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아이들은 착하지 않았네~

장편만화가 육아를 ‘건드리는’ 동안 생활 에피소드가 독자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바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유쾌하게 풀어낸 홍승우(38)씨의 <비빔툰>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998년 생활정보지에 연재를 시작해 다음해 <한겨레>에 둥지를 튼 <비빔툰>은 아이 키우기에 관한 세밀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홍씨는 가족을 화두로 삼아 건강한 일상을 웃음으로 풀어내고 있다. 자신의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만화의 소재로 삼기에 때로는 아내의 프라이버시를 노출하는 일도 있다. 물론 홍씨의 만화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삼기에 가정사 노출로 인한 ‘부부싸움’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에피소드에서 장편 드라마로. 국내 생활만화를 개척한 <반쪽이의 육아일기>의 최정현씨(왼쪽). 오른쪽은 부부 만화가로 육아 경험을 <키드갱>에 담은 신영우씨와 신시하씨. (사진/ 류우종 기자)

홍씨의 <비빔툰>은 ‘착함의 표상’쯤으로 여겨지는 아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그의 만화에 등장하는 아이는 감정의 기복도 심하고 엽기적 행각도 마다하지 않는다. 홍씨는 아들 동훈(8)이와 딸 유나(6)를 키우면서 사소한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순수하다는 생각을 떨쳤다. “아이의 말이나 행동을 자세히 보면 어른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더럽고 위험한 것에 손이 가기 일쑤고 예의는 필요할 때만 차리는 영악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모습으로 만화에 등장한 아이가 이제는 <비빔툰>에 적극 나서려고 할 정도로 컸다. 만화 소재로 삼으라며 자신의 하루를 쉴 새 없이 들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비빔툰>은 자라고 있다.

가정의 일상이 명랑만화의 새 밭을 일구며 통쾌한 반전을 시도하기도 한다. 늦깎이 만화가 정연식(38)씨의 <또디>는 “우리가 살아가며 딱 2% 부족한 공상을 채워주는 만화”(만화평론가 박인하)라는 평이 적절하다. 푸들 강아지 ‘또디’를 데리고 사는 주인공 이팔육과 아내 백숙 여사가 임신할 때부터 결혼 5년차에 이르는 과정을 주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푸근하게 풀어냈다. 일상의 삽화에 웃음을 곁들이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예컨대 에피소드 ‘천적’은 술에 곯아떨어져 흡혈귀를 물리치는 꿈을 꾸다가 프라이팬을 들고 돌진하는 백숙에게 체중계를 내밀어 사태를 마무리한다는 내용이다.

정연식의 <또디>는 생활을 소재로 삼았지만 만화적 상상력으로 일상의 단조로움을 단숨에 뛰어넘는다. <또디-사랑에 관한 짧은 이야기>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부분으로 이뤄졌으며 중간에 가족과 친구, 추억에 관한 작가의 에세이도 곁들였다. 이런 흐름은 프랑스 만화가로 독립작가군에서 활동하며 <랍비의 고양이> 같은 어린이 만화로 국내에 알려진 요한 스파의 생활만화를 빼닮은 듯하다. 요한 스파는 일상에서 겪은 일들을 하모니카 같은 악기 이름을 딴 각각의 장에 노트에 끼적이듯 적고 그렸다.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은 일상에 따뜻한 감동과 넉넉한 웃음이 있다는 점도 서로 통해 보인다.

요즘 생활만화는 인터넷에서 영역을 더욱 넓혀가고 있다. 육아에 참여하는 30대 만화가들이 인터넷에 둥지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부만화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육아만화는 ‘꿩 먹고 알 먹고’에 가깝다. 만화 소재에 대한 고민을 일거에 해결하고 인터넷의 전파력으로 이름도 쉽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부만화가 모임 ‘만만디’ 회원들은 각종 인터넷 육아 사이트에 생활만화를 연재하며 ‘좌충우돌 육아만화’전을 열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이지현(35)씨가 꾸미는 ‘야오네집’(www.yaohouse.net)은 야오(엄마), 나룽씨(아빠), 아냥(딸)이 등장해 육아와 일상에 대한 잔잔한 이야기를 만화로 들려줘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인터넷 ‘야오네집’에 가보셨나요?

인터넷은 아마추어 만화가를 스타로 만들기도 한다. 채지연(32)씨는 아이의 돌잔치를 치르며 ‘탄생일기’를 만화로 인터넷에 올려 유명세를 탄 뒤 <겸이 맘의 육아일기>를 연재해 단행본으로 펴냈다. 이런 생활만화는 일상으로 돌아간 세대들에게 이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공감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게다가 아이들의 발언 창구로도 쓰인다. 일러스트레이터 김영훈(47)씨의 만화 에세이 <오리의 기도>는 일곱살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본 일상과 세상을 보여준다. 생활만화가 세대간의 교류 창구 구실을 하는 셈이다. 생활만화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에 가족의 교류가 이뤄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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