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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귀하게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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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2-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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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아이포드와 연애하는 유행 속에서 퇴행을 자처하며 산 턴테이블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요즘 내 주변의 세련되고 진보된 사람들은 모두 ‘아이포드’로 음악을 듣는다. 애플에서 만든 이 MP3 플레이어는 정말 놀랍다. 일단 생긴 게 죽인다. 그야말로 디자인 역사에 남을 만한 멋진 물건이다. 게다가 무려 5천곡(40기가는 1만곡)이나 저장할 수 있다. 또한 액세서리가 무려 200여종이나 되기 때문에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기능이나 생김새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일례로 얼마 전 내 후배는 주문한 아이포드를 받자마자 그놈에게 입힐 옷을 사달라고 조르는 내용의 메신저 쪽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결국 털양말처럼 생긴 귀여운 아이포드 케이스를 받고 좋아라 하는 후배를 보며 나는 애플이라는 회사가 진실로 무서웠다.


심지어 어떤 추종자들은 아이포드라는 기계에 인격을 부여한다.

“내 아이포드는 80년대 노래만 좋아해.”

뭐 이 정도 얘기는 정상이다.

“내 아이포드는 나보다 내 남자친구 기분을 더 잘 아는 것 같아. 남자친구 몰래 외박하고 들어간 날 아침에 너바나의 를 내보내 나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더라.”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사용자가 셔플 모드를 사용하면 아이포드는 저장된 5천곡을 무작위로 섞어 재생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셔플 에피소드가 발생하는 거다. 더 웃기는 건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서는 “아이포드에 귀신이 산다”는 제목으로 셔플 괴담 기사를 다루었다는 거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획기적인 물건이 나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것 같다. 한번은 서로 코드가 잘 맞는다고 생각한 친구가 내 차 안에서 자기 아이포드에 저장된 제 취향의 음악들을 이곡 저곡 마구 들려줬는데 미안하게도 나로선 그때만큼 음악 듣기가 싫었던 적이 없었다. 맛보기식으로 30분 동안 한 100여곡쯤 듣는 동안 나는 웬일인지 머리가 아프고 속도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사실 그 즈음 난 이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난 더 이상 음악을 듣지 않고 있다. 들어도 귓등으로 듣는다. 왜일까? 이것은 혹시 타락의 징조가 아닐까?” 한때는 영원한 건 음악뿐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음악에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런데 지금은 듣지도 않는 CD를 1천여장이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짐스럽다. 그래서 홍익대 앞 중고 CD 가게에 내다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계산기를 두드려본 적도 있었다. 그렇다. 난 타락한 것이다. 어쩌면 이제야 어른이 된 것인지도 모르고.

타락하긴 했지만 아주 가망이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내 자신에게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에 난 며칠 전 무리 속에서 퇴행을 자처하며 여봐란듯이 턴테이블을 샀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음악 듣기의 즐거움이 LP 속에 있더라’했고 나는 누구보다 귀가 얇은 사람이었다. 특히 음악평론가 김갑수와 뮤지션 김형태의 영향이 컸다. 음악이 하찮아지는 건 너무 쉽게 얻기 때문이고, 시간과 공을 들이면 뭔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내게 알려줬다.

LP로 듣는 음악은 뭔가 다르긴 달랐다. 일단 소리가 달랐고 그 존재감도 달랐다. 꽤나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니 소리가 귀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낙후된 인간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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