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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도올, TV를 갖고 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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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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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선적인 강의 탈피해 엔터테인먼트적 효과 극대화한 <도올의 논어이야기>… 연출·편집에도 관여

(사진/도올의 뒤통수만을 잡은 장면.방송가에서 금기시되는 앵글이다.오강선 PD는 “깎은 머리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고 생각해 그대로 내보낸다”고 말한다)
1996년 5월18일 프랑스, 한 지식인이 텔레비전을 비판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에르 부르디외였다. 평소 텔레비전의 삿됨을 비판해온 부르디외에게 프랑스는 바로 그 텔레비전을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 준 것이다. 이 방송은 녹화방송이었는데, 2차례 방영되었다.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은 직접 민주주의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이 상징적 억압의 도구로 쓰이지 않도록 싸우는 영상업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도구와 무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골든타임 15.6% 시청률의 비결

그러나 이는 이상적인 만큼 어려운 일이다.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는 심도있는 내용을 말해야 하는데 향유계층이 대중이 아닌 소수라면 미디어를 전달하는 의의가 없어진다. 쉬운 내용으로 일관하면 깊은 논의를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향유계층을 넓힐 수 있다고 한들 TV는 바보상자를 면키 어렵다.


2000년 12월8일 한국, 또 한명의 지식인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방송 내용은 ‘중학교 2학년 수준’을 엄수해야 한다는 텔레비전의 묵계를 깨고 대학생이 봐도 공부가 되는 동양사상을 설파한다. 그러나 이제는 자막과 자료화면, 과감한 앵글 즉 텔레비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각종 효과들을 대동하고서다. 한국방송공사의 <도올의 논어이야기>가 그것이다.

<도올의 논어이야기>(금요일 밤 10시∼11시, 11시30분∼12시30분)는 도올 김용옥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논어를 강연하는 프로그램으로, 한주에 두 시간씩 100번의 강의를 50주에 걸쳐 방영한다. 전반 한 시간 방영하고 잠깐 뉴스가 나가고, 다시 후반 한 시간을 방영한다.

공교롭게도 이날 녹화현장에서 도올은 마샬 맥루한의 ‘쿨 미디어, 핫 미디어’에 대해 언급했다. 맥루한은 미디어를 쿨 미디어와 핫 미디어로 나누었는데, 핫 미디어는 상대적으로 정보량이 많은 미디어, 쿨 미디어는 정보량이 적은 미디어를 말한다. 따라서 텔레비전은 책이나 신문보다 쿨 미디어에 속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서술할 때, 신문이 텔레비전보다 더 많은 정보량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터넷에서 뉴스를 문자화한 서비스를 받아보면 금세 알 수 있다. 텔레비전은 이미지 중심으로 기술되기 때문이다. 도올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쿨 미디어에서는 쿨한 내용만 방영해야 한다는 것은 전세계적인 편견이다. 그러나 맥루한의 이분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쿨 미디어를 통해 밀도있는 내용을 전달하는 새로운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지적 기반은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이 된다”라고 단언했다.

쿨 미디어에 핫 메시지를 담고자 한, 아니 아예 쿨 미디어와 핫 미디어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한 도올의 시도는 성공했는가? 시청률 하나로 프로그램의 성공여부를 재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지만, 시청률 11%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이 꾸준히 시청률을 올려 일곱 번째 방영만에 15.6%(AC 닐슨코리아 집계)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간대는 다른 방송사와 경쟁이 치열한 금요일 골든타임이다. 이 프로그램의 홍경수 PD는 “이 시간대에 강의 두개를 연달아 방영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방송공사 편성의 새로운 역사”라고 말한다. 이런 방송은 보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전반 한 시간의 강의보다 후반 한 시간의 시청률은 2∼3% 떨어지는 편이다. 반면 전반 한 시간과 후반 한 시간 가운데 들어가는 뉴스는 평일 시청률보다 2∼3% 정도 더 높다고 한다. <도올의 논어이야기> 시청자가 뉴스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다.

관객배치, 의상까지 치밀한 연출

(사진/이 프로그램에서 자막은 필수다.“녹화해서 받아쓰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신경쓴다”고 관계자는 귀뜸한다)
이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법들이 이용된다. 클로즈업, 자료화면 끼워넣기(인서트), 자막과 같은 촬영기법이 그것이다. 이전 TV강의는 아무리 튀어봤자 서한샘씨 수준을 넘지 못했다. 강연자가 “진달래 땡야, 밑줄 쫙” 하며 억양을 달리해서 재미를 주려고 노력하면서도, 화면은 칠판을 포함한 전신을 비춘 장면, 혹은 가끔 방청객을 넓게 잡은 장면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그런데 <도올의 논어이야기>는 강연자가 침을 튀기는 것까지 보이게끔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자료 화면이 들어가기도 한다. 심지어 도올은 뒤통수만 나오고 관객 얼굴이 주로 잡히는 장면도 허다하다. 강연자의 뒤통수를 부각해서 쓰는 방식은 방송계에서 잘 쓰지 않는 촬영 각도다. 예를 들어 디자인의 한 유파인 바우하우스를 설명하면서 바우하우스에 관한 화면을 끼워넣고,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신세계 교향곡>을 배경음악으로 넣는 식이다. 여기에 자막이 꼭 들어간다. 강의 내용을 아무리 빨리 칠판에 적어도 말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이 단점을 자막으로 해결한 것이다. 자막은 또 한 가지 기능을 한다. 재미로 보는 사람은 도올의 강연을 ‘들으면서’ 즐기게끔 하고, 공부하는 기분으로 보는 사람은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받아쓰게 하는 것이다. 시청자의 취향에 따라 얻어갈 수 있는 정보량을 차별화시킨 것이다.

사실 도올은 1991년 개봉된 임권택 감독의 영화 <개벽>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미 이런 기법을 시도한 적이 있다. 최시형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을 뜯어보면, 화면으로는 최시형의 개인적 상황을 다루면서 화면 아래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간결히 요약한 자막을 내보낸 것이다.

촬영기법뿐만 아니라 관객의 배치, 도올의 의상까지도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간에 하나의 거대한 메시지를 구성하고 있다. 도올이 관객배치에 까다롭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도올의 의상 역시 길거리 아무데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의상은 아니다. 흰색 한복 또는 검정색 창파오(중국옷) 둘 중 하나다. 스스로 디자인했다고 하는 이 검정 내리닫이는 카메라에 잡혔을 때 일반인과 확실히 구별되게 한다. 일찍이 <유에스에이 투데이>의 사장 뉴하스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검정 혹은 하얀색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흑백 의상과 빡빡 깎은 머리 역시 도올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화면 속 심벌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세한 연출을 위해 총연출을 맡은 오광선 PD는 도올과 일주일에 적어도 4번 만나서 의견 조정을 한다고 말한다. 월요일에는 도올쪽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화요일에는 녹화를 하고, 수요일에는 만나서 자료를 찾고, 목요일에는 방송사에서 편집하면서 만난다. 자료 찾기에서 녹화, 편집까지 출연자가 방송에 이처럼 깊이 간여한 예는 찾기 힘들다. 도올은 카메라 앞에서 강연을 하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서 카메라 뒤에서 보이는 자신의 이미지까지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녹화를 끝내고 그 내용을 속기록으로 만들어서 도올이 직접 부분부분 삭제하기도 한다.

대담과 강연을 섞어짜는 시도도

(사진/강의 중간중간 자료화면이 들어가는 것도 TV강연 프로그램에 있어서는 새로운 시도다.마치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보는 느낌을 준다)
이 방송을 교양국이 아닌 예능국에서 주관하는 것도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방송’을 염두에 둔 도올의 의견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다. “예능국 PD의 화면이 좀더 동적이라는 도올 선생의 의견이 있었다”고 오 PD는 밝힌다.

현대 매스미디어의 주체는 두 부류로 대별될 수 있다. 첫째는 이미지 그 자체가 되는 사람인 아나운서나 탤런트이고, 둘째는 이미지를 만드는 막후의 인물인 PD나 방송작가이다. 그런데 도올은 스스로 두 가지 모두에 뛰어들어 매스미디어의 가능성을 실험했다고 할 수 있다.

쿨 미디어에서 핫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도올의 실험은 어디까지 연장될 것인가? 12월22일 <도올의 논어이야기>에서는 대담과 강연을 섞어짠 새로운 형식을 선보인다. 구로즈미 마코토 도쿄대 윤리학과 교수가 도올과 동반출연해서 일본의 유학과 한국의 유학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면서도 도올은 쿨 미디어를 통한 의사소통 가능성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지는 않다. 그 예로 <도올의 논어이야기>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다른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흔히 있는 시청자 참여 코너가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 시청자는 아주 좋아하든지 아주 싫어하든지 반응이 극단적이다. 그런데 좋아하는 쪽은 굳이 글을 올리지 않지만 싫어하는 쪽은 올린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게시판을 볼 때는 편향된 시각을 가지기 쉬워 게시판 난을 만들지 않았다”는 게 이 프로그램 관계자의 말이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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