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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국가 위의 국가’를 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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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2-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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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의 과거사 청산은 왜 중요한가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1970년대의 시사만화를 보면 무슨 유니폼마냥 선글라스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사내들이 종종 나온다. 이름하여 기관원. 하도 무서워서 중앙정보부원이라 부르지도 못했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할 정보요원들이 ‘기관원’임을 숨기지도 않고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행동하고 다니던 그런 시절이었다.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던 중앙정보부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 그 암울했던 시대의 흔적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짙게 배어 있다.

공화당 창당 자금을 위한 ‘장난질’

5·16 군사반란의 주역은 정보장교들이었다. 박정희가 그랬고, 김종필이 그랬고, 박종규도 두 사람과 함께 육군본부 정보국 밥을 먹었다. 이런 자들이 반란에 성공한 뒤 제일 먼저 한 것은 중앙정보부라는 거대한 정보기관을 만드는 일이었다. 반란범들이 헌법을 짓밟고 최초로 만든 ‘법’은 반란에 가담한 군인들로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기관이 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었다. 이 법이 공포된 것은 1961년 6월6일이고, 그로부터 4일 뒤인 6월10일 ‘중앙정보부법’이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함께 공포되었다. 반란의 주역들은 처음부터 반란이 성공하면 중앙정보부 같은 막강한 정보기관을 만들어 국가재건최고회의법의 중앙정보부 조항에 규정된 것과 같이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독재권력은 정보기관에 엄청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켰다. 왼쪽부터 지금의 국정원, 남산의 옛 안기부, 서울 이문동 옛 중앙정보부 터의 담장. (사진 / 한겨레 황석주)

반란범(자기들 표현으로는 혁명주체)들은 중앙정보부에 일찍이 유례가 없는 막강한 권능을 부여했다. 중앙정보부법에 따르면 이 기관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감독”하며, 정보부장은 “정보수사에 관하여 타 기관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또 정보부장, 지부장, 수사관은 범죄수사권을 갖지만 “수사에서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라고 규정됐으며, “정보부 직원은 그 업무수행에 있어 전 국가기관으로부터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만들어놓았다. 중앙정보부는 최고 독재자에게만 머리를 숙일 뿐, 제도적으로 국가의 어떤 기관보다도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통성 있는 정부를 총칼로 뒤엎은 자들이 그렇게 탈취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 중앙정보부였다. 그러니 이름과는 달리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 주된 임무일 수만은 없었다. 서른여섯의 ‘새파란’ 예비역 중령 김종필이 “나는 최고위원이 되기보다는 중앙정보부장을 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기자회견을 했을 때 눈치 빠른 기자들은 이름에 ‘최고’가 들어가는 최고회의보다 중앙정보부가 훨씬 힘센 기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김종필을 초대 부장으로 하여 출발한 중앙정보부가 직면한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란 반란군 내부의 갈등이 표출된 반혁명 사건이었다. 군정이 실시된 2년7개월 동안 공식으로 발표된 반혁명 사건은 10건이 넘었다. 이 밖에도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통화개혁, 부정축재자 처리, 농어촌 고리채 정리 등 국내의 주요 사회경제 시책뿐 아니라, 대일 수교와 같은 외교정책까지 모두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이런 굵직굵직한 일들을 요리했지만, 김종필의 중앙정보부가 행한 진짜 중요한 일은 민주공화당의 창당을 위한 사전조직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보와 조직과 권력만으로 정당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돈,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족자본을 형성한다는 미명하에 화폐개혁 등을 통해 비장되어 있는 국내 자금을 동원해보려 했지만, 이 계획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의 조직과 권력을 동원하여 정치자금을 만들어내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터져나온 것이 워커힐 사건, 파친코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증권파동 등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었다. 지금의 한나라당의 뿌리가 되는 공화당은 파친코 등 4대 의혹 사건을 통해 조달된 부정한 돈으로 창당된 것이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기반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갔지만, 1인자가 아니라 2인자인 김종필은 독주하면 할수록 적은 더 많아졌다. 그게 권력의 생리였다. 이른바 반혁명 사건이란 대체로 ‘혁명주체’ 안에서의 권력 갈등인데, 특히 육사 5기와 8기의 대립이 심각했다. 이들은 기수로는 3기 차이지만, 다 같이 1948년에 임관했고, 나이도 비슷했다. 5기의 김재춘은 김종필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을 모아 박정희를 압박하여 김종필을 중앙정보부장에서 몰아냈고, 이에 김종필은 “자의 반, 타의 반”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외유길에 올랐다.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약 40여일을 김용순에게 갔다가 반김종필 진영의 선봉이었던 김재춘에게 돌아갔다. 김재춘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마자 김종필이 8기 중심으로 채워놓은 국장과 지부장 30여명을 전격적으로 갈아치우는 등 대대적인 기구 개편을 단행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5개월 만에 자리를 김형욱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중정부장들의 뒤끝은 좋지 않았다

막강한 정보기관의 수장을 지낸 인물들. 왼쪽부터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 전두환. (사진 / 격동한반도새지평)

박정희 시대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사람들은 대개 뒤끝이 좋지 않았다. 오로지 독재자의 신임에 기대어 악역을 맡아온 자들이 독재자의 신임이 사라질 때 뒤가 좋을 리 없었다. 그 중에서도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 설만 구구할 뿐 문자 그대로 뼈도 추리지 못한 김형욱은 가장 뒤끝이 좋지 않은 정보부장이었다. 정통성 없는 정부의 정보기관 책임자라는 자리는 업을 쌓을 수밖에 없는 자리인데, 그 자리를 타의 추종을 불허하면서 무려 6년3개월이라는 긴 기간 동안 꿰차고 앉았으니, 남보다 업을 쌓아도 한참을 더 쌓았을 것이다. 김형욱의 전임자나 후임자들 모두 나름대로 독재정권의 파수꾼으로서의 악역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하면 떠오르는 음습한 이미지를 극대화한 인물이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1차 인혁당 사건, 동백림 사건 등 대형 조직 사건 이외에도 야당 의원들의 여자 관계 추적, 도청, 미행, 협박, 불법 연행과 고문, 흑색선전 등을 밥 먹듯이 했다.

박정희 시대에 중앙정보부는 막강했다. 중앙정보부가 막강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중앙정보부가 지켜야 했던 박정희 정권이 극도로 취약했기 때문이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꾸 정보기관에 의존해야 했고, 정보기관은 자신에게 기대려는 독재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꾸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은밀하게 진행돼야 할 정보 수집과 분석 대신, 행정조정이란 이름하에 정부 각 부처나 언론, 심지어 기업에까지 정보부가 개입하다 보니 정보부는 아예 공개적으로 내놓고 움직였다. 국회에는 정보부나 보안사의 국회담당관이 사무실까지 차려놓고 있었다. 정보기관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존재여야 하지만, 박정희 시대의 중앙정보부는 국민들에게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기관으로 비쳤다. 어떤 의미에서 중앙정보부는 국민들이 중앙정보부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을 한편으로 즐기며, 활용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대의 정보기관은 정보장교끼리의 파워게임의 수단이 돼버렸다. 초기의 반혁명 사건들도 그런 사례지만, 박정희가 살해당하는 10·26 사건도 권력의 최고 상층부 내에서 중앙정보부 대 중앙정보부를 견제하기 위해 직제에도 없는 비선 정보조직을 만든 경호실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차지철의 경호실은 전두환의 처삼촌으로 헌병감을 지낸 이규광을 책임자로 하는 비선 정보조직을 운영하면서 김재규를 견제했다. 이런 대립 과정에서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독재자를 살해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유신정권을 유지하는 핵심기관으로 육성했다. 중앙정보부는 의회로부터 예산이나 업무의 감시와 통제를 받지 않는, 국가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국가였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보부를 견제할 마땅한 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나 그 후계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이 다른 행정부처에 대해 힘을 쓸 수 있는 근거는 행정관청에 대한 보안감사와 각 부처 예산에 편성되어 있는 정보비에 대한 감독권이다. 1988년 국가안전기획부에 대해 최초로 월간지에 분석기사를 쓴 조갑제는 보안감사는 예고 없이 어떤 관청의 사무실에 대해서도 할 수 있으므로 안기부가 공무원들을 상대로 언제든지 압수수색을, 그것도 영장 없이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비유했다. 이런 감독권에다 고급공무원 인사에서 정보기관의 신상평가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정부부나 안기부와 맞서려 하지 않았다.

정작 해외나 북에 대한 정보 어두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정보기관의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로는 정보기관들이 국내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해외나 이북 정보에 어두웠던 점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중앙정보부는 박정희가 신경쓸 만한 정치인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데 인력과 장비와 예산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런 정보란 대체로 누가 누구와 만나서 밥을 먹고 술 마셨다 하는 이야기들로 가십에 불과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1960년대 말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을 지낸 그레그는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해외나 북한 정보에는 관심이 없고 국내 정치에만 매달린다고 불평했다. 중앙정보부는 국내에서도 악명이 높았지만, 해외에서도 만만찮게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국익’과 나라의 체면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동백림 사건 처리 과정에서는 독일 정부로부터 국교 단절 불사라는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코리아 게이트로 불리는 박동선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외무부를 제치고 무리하게 대외 공작을 벌이다가 대미 외교를 파국 일보 직전으로 몰고 간 최악의 사례였다. 1970년대의 한국에는 어디나 “안 되면 되게 하라, 하면 된다”라는 군대식 구호가 퍼져 있었다. 박동선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한국에서 밀어붙이던 방식을 미국에서 그대로 써먹으려다가 엄청난 부작용을 자초한 사건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인 1973년 10월에 발생한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 피살 사건은 중앙정보부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했다. 최종길 교수가 고문으로 숨졌을 때, 박정희 정권은 이미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 더 큰 국가 범죄로 변하는 것을 막는 대신,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관련자들을 보호하고,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조작했다. 당시 최종길 교수의 동생은 중앙정보부 감찰실 직원이었는데, 감찰실은 중앙정보부 직원의 비리나 독직 사건에 대한 수사권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 감찰실은, 아니 중앙정보부는, 아니 중앙정보부를 거느린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간첩 최종길이 자기 혐의가 들어나자 남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투신자살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 부원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든 국가권력이 마찬가지지만, 정통성이 없는 독재권력일수록 국가기구, 특히 폭력을 다루는 기구 구성원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게 된다. 만약 박정희 정권이 최종길 교수 사망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고문치사 관련자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중앙정보부 등 공안기관의 어느 누구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고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고문이 비록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중앙정보부는 법 위에 군림하는 특수기관이고, 설혹 빨갱이를 고문하다가 조금 사고가 났다 하더라도 회사(중앙정보부)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내게 별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직원들에게 심어주지 않는 한, 불법과 탈법을 지속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최종길 교수 사건이 그렇게 처리된 것은 의욕을 갖고 열심히 일하다가 피의자의 신상에 ‘조그만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회사에서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라는 충분한 신호가 되었다.

민주화된 시대의 정보기관이 할 일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제 웬만해서는 그들을 말릴 수 없게 되었다.

정보기관이 정보의 수집과 분석에 그치지 않고, 수사권을 갖고 더구나 국내 정치 상황이 어려울 때 간첩 사건을 때맞춰 터뜨리다 보니 고문에 의한 조작 의혹이 끊이지 않고, 정보기관의 공신력도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공안검사들조차 중앙정보부의 수사기록을 믿지 못하겠다고 반발하다가 사표까지 썼던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에서부터 현재 국회에서 때아닌 간첩 논쟁을 불러온 1992년의 중부지역당 사건에 이르기까지 고문과 조작 의혹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특히 수지김 사건이라든가, 부천서 성고문 사건처럼 피해자들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밝혀진 사례들은 군사독재 시절 정보기관의 부정적 역할을 일반 시민들에게 각인해주었다.

정보기관들은 국내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해외나 이북 정보에 어두웠다. 미국 행정부와 의회 지도자들을 매수하다 물의를 일으킨 ‘코리아 게이트’의 주인공 박동선씨.

2004년에 들어와 과거 청산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국정원도 과거의 부정적인 사건들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민주화, 세계화된 시대에도 정보기관은 여전히 필요하다. 아니, 과거와는 다른 차원에서 필요성은 더 증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부정적인 기억은 국정원이 민주화된 시대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국정원이 지난 11월,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발족한 것은 국정원으로서나 시민사회로서나 매우 중요한 실험이 될 것이다. 나 자신 발전위원회의 말석에 참석하는 입장에서 매우 조심스럽지만, 과거 중앙정보부 - 안기부 - 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은 1961년 이래 국가의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은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상적인 견제와 감시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보기관은 간첩을 잡기도 했지만, 만들어내기도 했고, 심지어는 간첩을 보내는 북과 손잡고 남쪽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정보기관이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정통성이 없는 독재자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결과는 이제 부메랑이 되어 정보기관을 때리고 있다.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한국의 과거 청산 노력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같은 국가기관이었다 해도 의문사위원회가 국정원의 내부 자료에 접근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국정원은 스스로 음습했던 과거의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하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아니라, 내부의 변화와 요구에 기초하여 국정원 스스로 자료를 정리하여 공개하게 될 것이다. 발전위원회에 민간위원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국정원이 혹시라도 자료를 숨기거나 감추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또 현재 남아 있는 자료- 은밀한 공작의 경우 폐기된 자료도 많을 것이다- 를 국정원쪽과 함께 철저히 조사하여 시민사회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중부지역당 사건, 관심사로 대두

과거 청산이란 국가가 시민들을 상대로 범한 국가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하여 진상을 밝히고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작업인데, 국방부·경찰·검찰 등 힘있는 국가기관은 모두 이 작업을 비껴갈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중앙정보부-안기부는 군사독재 시절 각종 정보기관, 공안기관을 통할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각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다행히 국정원이 상당히 적극성을 갖고 과거 청산에 임하고 있는데, 국정원의 발전위원회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다면, 이는 아직 과거 청산과 관련하여 주저하고 있는 다른 국가기관을 추동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침 발전위원회의 출범과 더불어 안기부가 조사한 중부지역당 사건이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이 사건은 워낙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새삼 이번에 논란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원회의 조사 대상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조사에 착수해보아야 알겠지만, 사건이 방대하기 때문에 며칠 안에 쉽게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그런 사건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이번 논란이 왜 과거사 진실 규명이 필요한지, 독재정권 때문에 우리 사회 전체가 얼마나 큰 대가를 오래도록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의 계기가 되어 과거사 규명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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