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자극하는 이문열, 이인화, 김지하의 ‘문학적 파시즘’에 대한 한 반격
김철 연세대 교수가 쓴 <국문학을 넘어서>(국학자료원 펴냄, 1만2천원)는 논문집도 수필집도 평론집도 아니다. 굳이 이름붙이자면 논문, 문학평론, 작가 인터뷰 등을 잡다하게 묶은 책이다. 그러나 눈길을 끄는 글 두편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일독할 만하다.
그 첫 번째는 ‘외설(猥褻)의 공포(恐怖)’다. 여기서 외설이란 소설가 이문열의 <선택>과 이인화의 <인간의 길>에 대한 작가의 평을 한 단어로 압축한 것이다. 그러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작자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두명을 외설물의 저자라고 결론지었는가.
주인공은 작가의 ‘확성기’에 불과한가
일단 이문열의 <선택>에 대해서 작자는 ‘문체의 혼란’과 ‘소설적 구성의 허술함’을 준열히 지적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선택>은 17세기에 살았던 장씨부인의 입을 빌려 보수주의적 여성의 길 역시 하나의 선택이었음을 강변하는 소설이다. 그런데 “나는 열아홉 나던 광해 8년 영해부 나라골 재령이씨 가문으로 출가했다”로 시작되는 장씨부인의 목소리는 “제도가 자기보존의 열정에 빠져 방어본능을 한 권리로 휘두르기 시작하면 개인에게는 치명적인 억압장치로 변질되기도 한다”는 논설문으로 바뀐다. 작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슨 <현대여성론 입문>류의 어투”가 되는 것이다. 느닷없이 서구의 개인주의를 논하고 변증법을 들먹이는 17세기의 부인네는 다름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작가다. 이러한 문체의 혼란은 이문열 소설에서 주로 이데올로기 문제가 개입했을 때 발생한다. <선택>에서는 페미니즘을 공격하고자 했을 때 그러했고, 김삿갓의 일생을 다룬 중편소설 <시인>에서는 민중문학을 공격할 때 이런 양상이 두드러졌다는 게 작가의 의견이다. 이런 새된 공격의 목청에서 작가는 ‘외설이 주는 공포’를 느끼며, ‘무시무시하다’고 표현한다.
또한 소설적 구성의 허술함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부분이다. 아침저녁으로 먹여야 할 입이 200명이 넘는 살림을 장씨부인은 꾸려왔는데, 그 살림을 지탱하는 부(富)의 출처는 모래로 쌀을 만드는 기적과 같이 의문에 싸여 있다. 뒤에 “입에 담을 만할 것이 못되는 재물”이 있었다는 설명이 있으나 이로써 200명을 먹이고 손님을 맞고 흉년 때 구휼까지 했다는 설정은 소설로서의 인과성 부족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 작자는 <선택>이 내포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보다 소설로서의 함량미달에 초점을 맞춰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선택>의 반페미니즘, 혹은 보수적인 성격을 공격하면 오히려 그것이 그 이념을 선양하고 강화해주는 측면이 있다. 이념 논쟁이 되면 상대방 이념 역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이 <선택>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선택>에서 받들어 칭찬하고 있는 순절(殉節)에 대해서 “사람 목숨을 개나 도야지의 그것만큼도 여기지 않는 순절행위를 ‘인간이 연출하는 아름다움’이라고까지 미화하는 이런 극단적 발언은, 제정신 있는 사람이면 어떤 경우든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단언하고, “이런 불량상품을 만들어내고도 시끌시끌한 논쟁을 벌이게 하다니 과연 권력은 권력이다”라는 말로 총평을 대신한다.
힘에 대한 숭배, 그것이 ‘외설’이다
이인화의 <인간의 길> 역시 “함량미달”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의 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모델로 구상한 인물 허정훈의 일대기다. 김 교수는 “소설은 작가가 준엄하게 꾸짖거나 작가 혼자 독백하는 것을 듣는 장르가 아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모두 작가자신의 분신에 불과하다. 전부가 이인화씨의 이념을 대변하는 메가폰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 허정훈이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치우고 고민하며 내뱉는 독백은 다음과 같다. “나는 누구인가… 저 수많은 책들 중에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인화의 대표소설 중 하나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김 교수는 이 소설이 비현실적이고 인물의 성격이 혼란스럽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건희라는 인물인데, 이 인물은 허정훈의 고향 선배로 처음에는 대구 경찰부의 경부로 출세했다가, 만주로 건너가 아편농장의 농장주가 되고, 허정훈이 속한 지하조직의 숨은 지도자가 된다. 이 기이한 인물 유건희는 결국 작가의 메가폰이자 인형이라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즉 작가 자신의 관념이 소설 내의 인물보다 더 설치는, <선택>에서 이문열이 행한 것과 같은 동일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와 함께 <선택>과 <인간의 길>은 강력한 힘에 대한 숭배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것은 어떤 야한 광고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대중을 자극하기에 ‘외설’이라 명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외설의 유혹에서 대중은 자유롭기 힘들기 때문에, 이제는 이 외설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대중을 자극하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본능, 즉 ‘외설’은 곧 파시즘과 통한다. 두 번째 글 ‘민족-민중문학과 파시즘:김지하의 경우’는 시인 김지하 안에 내재한 파시즘을 비춰봄으로써 폐쇄적 민족주의가 어떻게 파시즘으로 변화하는가를 밝히는 글이다. <사상기행>(실천문학사 펴냄)에 나타나는 김지하의 다음 인터뷰는 그 변화의 시작이다.
“한 문명의 쇠퇴기에는 반드시 인류의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하는 민족이 나타나는데 이 민족을 성배(聖杯)의 민족이라고 그래요.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을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죠. 오늘날은 한민족이라구.” 저자는 이 발언이 선민의식을 강조하는 파시즘과 통하는 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김지하의 민족주의가 함유하는 파시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같은 책에는 김지하가 지방 작은 절에서 한 노파를 만나 나눈 대화가 기록돼 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세상이 바로 미륵님 덕택으로 온다 이거요”라는 노파의 말에 김지하는 “참 좋네요. 우리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다니”라고 답한다. 김 교수는 또 “우리 민족은 천손족(天孫族)족의 후예이며 그것은 <환단고기> <천부경>으로 입증되는 것이니, 이제는 아시아 전체를 휩쓸었던 이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김지하의 발언이 “일본은 시조신 아마테라스의 손자 호노노기니가 강림한 천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국(神國)이며, 이는 <일본서기> <고사기> 등으로 인해 입증되니, 이제 신국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일본 극우의 발언과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아득한 옛날의 위대한 우리나라를 추억하고 언젠가 이뤄질 대제국을 꿈꾸는 것은 현재의 구체적인 갈등을 잊게 한다. 이는 곧 사회의 모순에서 대중의 관심을 돌리는 파시즘의 반혁명적 본질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파시즘과 싸워온 김지하가 바로 그 파시즘적 요소를 지적받음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김지하론 외에도 작자는 행간마다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소설가 조정래와의 대담기록 ‘저 슬픈 장엄한 고개넘어’에서는 아예 민족주의 자체에 대해 회의적으로 질문한다. 민족주의가 인류사적 전망을 지닌 이념일 수 있는가 하고. 김 교수는 “내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민족주의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족주의를 넘어서고자, 혹은 ‘국문학을 넘어서’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곧 파시즘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다. 이달 말 출간될 예정인 <문학속의 파시즘>(삼인출판사 펴냄)이 그 중간 결과물이라고 한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