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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차잎의 촉감을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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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1-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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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술탐’이라는 낙후된 내 취향으로 바라본 요즘의 차(茶) 트렌드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디자이너 마영범의 다실. (사진 / 이전호)
요즘은 차를 마시는 일이 가장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행위로 대접받고 있는 듯하다. 영화감독 임권택, 소설가 한승원,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선생은 한 봉지에 무려 15만원이나 하는 지허 스님이 만든 차를 그야말로 다반사로 마시는 한국전통자생차보존회 회원으로 알려져 있고,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인 박경준 선생은 “문화인이라면 적어도 다기 세트 하나 정도는 마련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라고까지 말한다. 한편 내가 좋아하는 한 아트 웹진에서 지허 스님이 만든 ‘금화산 잎차’를 숍 코너에서 팔고 있었는데, 요즘은 아예 지인들끼리 돈을 모아 차밭을 사거나 차농장에 투자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여전히 술만 마셔대는 내 자신이 왠지 낙후된 인간처럼 느껴진다. 설상가상으로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는 천상병 시인의 취중명언을 외치며 함께 술을 탐하던 선배가 요즘은 술을 딱 끊고 차에 빠져 있어서 더욱 의기소침하다. 아예 자기 사무실 한쪽에 다실까지 만든 풍경에 괜히 배알이 꼴린 나머지 “최첨단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한국 전통차를 마시겠다고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선배 모습은 아이러니다”라고 쏘아붙여도 소용이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난 무릎 꿇고 마시지 않아. 번거로운 다풍이나 복잡한 다도 절차를 대부분 생략하고 아주 편안하게 마시고 있어. 때로는 사발처럼 생긴 커다란 말차 그릇에 녹차를 마실 정도야. 왠지 그게 편안하고 멋져 보여서 말이야. 사실 진짜 아이러니는 한국 전통차를 마시겠다고 한복 입고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사실 격식 차린 다도는 대부분 일본 사무라이들의 예법이거든.”

나중에 사무실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니 그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다도에 대한 지허 스님의 말은 너무나도 명쾌했다. “굳이 우리 다도를 말하라면 ‘누워서는 마시지 마라’쯤 되겠다.”

중요한 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고요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일이라고 하는데, 선배는 자신도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너 알지? 내가 촐싹대는 거. 차를 넣고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그 1분간이 여전히 나한테는 하염없이 긴 존재의 시간인 거야. 손이 근질근질해서 나 혼자 있을 때는 주전자를 막 흔들어. 그리고 몰래 손으로 딱 찍어보기도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 올 때는 막 폼 잡지. 그럴 때마다 느껴.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그 대신 선배는 디자이너답게 차의 미학을 아주 감각적인 방법으로 즐기고 있었다. 다관에서 물 따르는 소리, 도자기 잔의 촉감과 따뜻함, 오래된 그릇에 남아 있는 미세한 유약층의 흔적 같은 것…. 더욱 기가 막힌 건 차봉지에서 부스러질 것 같은 차잎들을 손으로 가뿐하게 집어올릴 때의 촉감이 좋아서 일부러 차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한편 그가 몇백만원짜리 사발을 사서 모으는 데에도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그릇의 미적인 비례감도 좋지만 비어 있다는 사실이 더 좋아. 나한테 비어 있는 오브제만큼 크리에이티브한 자극을 주는 게 없거든.”

한 다인에 의하면 차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정중동의 정서’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어떤 디자이너는 ‘비어 있는 공간만큼 사치스러운 건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게 결국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쓸데없이 너무 시끄럽고 쓸데없이 너무 가져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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