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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니스커트, 맘대로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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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1-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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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장사꾼과 미디어가 찍어대는 판박이 ‘어그 스타일’은 지루해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기형도는 사랑을 잃고 시를 썼지만, 당시 나는 사랑을 잃고 살을 빼곤 했다. 아프다, 아프다 생각하니 입맛이 없기도 했지만 왠지 많이 앓은 여자처럼 전시하기 위해서라도 안쓰러울 정도로 비쩍 말라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보다 무려 9kg이나 덜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홍대 앞의 매정에 전열된 어그부츠.
그러니까 태어나서 처음 겪은 쓰디쓴 첫 실연의 부상으로 나는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 있었다.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지겨워서 못해먹겠다고 생각한 다음달이었다. 명동에 나가 엄마 신용카드로 검정색 초미니 스커트와 투박한 버클이 달린 검정색 가죽 롱부츠 한 세트를 샀다. 그리곤 당장 그걸 입고 거리로 나왔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어두침침한 바에서 남자를 쉽게 유혹하고 쉽게 버리기도 하는 악녀처럼 느껴졌다. 옷차림이 사람의 행동을 좌우한다더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명동 한복판에서 담배 한대를 피우고는 그 꽁초를 부츠 뒷굽으로 무자비하게 비벼 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곤 그날 밤 놀기 좋아하는 친구를 불러내어 당시 홍대에서 한창 물 좋기로 유명한 클럽에 가서 밤 12시까지 춤을 추고 놀았다. 엄마가 욕을 하거나 말거나 그날 밤엔 하도 피곤해서 모처럼 잠도 잘 잤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는데 지금도 가끔 미니스커트가 입고 싶다. 그 기간 동안 여자들의 스커트 길이는 트렌드에 따라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거렸지만 지난해부터는 쭉 오름세라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불황 때문이라고 진단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 말이 잘 와닿지 않는다. 루이 암스트롱을 따라나섰던 윤복희 언니가 당시 런던에서 엄청나게 유행하던 메리 퀀트 여사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한편에서는 야유를 퍼붓고 한편에서는 저항과 자유의 새 바람을 읊었지만 정작 본인은 단지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미니스커트가 여자들에게 심리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아이템이긴 하지만 불황이라는 시대 정서를 반영하기 위해서 입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에게 ‘불황에는 미니스커트가 유행이다’라는 말처럼 지루한 명제가 없는데, 이 말은 장사꾼과 미디어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똑같은 부츠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나? 홍대 앞에 가봐라. 젊은 여자들이 죄다 ‘양털장화’로 불리는 ‘어그(UGG) 부츠’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 의류 매장을 살펴보니 다들 똑같은 물건을 팔고 있고, 신문을 찾아보니 ‘미니스커트에 어그 부츠나 스웨이드 주름 부츠 신는 게 유행인데, 할리우드 스타 누구가 입었다’더라 식의 기사가 수십 군데 실려 있다. 참으로 지겨운 일이다.

그나마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 미니스커트가 더 이상 날씬한 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965년 영국의 디자이너 메리 퀀트가 ‘엄마처럼 입기 싫다’며 만든 미니스커트는 기성 세대에 도전하는 청년 정신의 산물이었는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모델 트위기처럼 깡마른 몸매의 젊은 여자들을 돋보이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마치 ‘뚱뚱하고 다리가 굵은 여자애들이 미니스커트 입는 게 유행인가?’ 싶을 정도다. 그런 여자들을 흉보는 남자들도 요즘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 이제 내 후배의 말마따다 자신의 욕구와 상관없이 남자들이 선호하는 청순하고 단아한 옷차림만 고집하던 참하고 예쁜 굿걸들의 시대도 저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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