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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자본이 출판에 달려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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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1-04 00:00 수정 : 2008-09-1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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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몸부림치는 어느 출판인의 기록 <열정의 편집>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언론이든 출판이든 종이 만지는 일은 언제나 몸부림이다. 그것은 운명적으로 안팎의 검열에 시달리는 일이며, 권력과 자본에 한없이 부대끼는 일이다. <열정의 편집>(앙드레 쉬프랭 지음, 류영훈 옮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은 어느 미국 출판인의 몸부림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묵묵히 매카시즘과 냉전의 포연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었지만, 1980년대부터 이길 가망 없는 괴물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거대자본이었다.

앙드레 쉬프랭은 출판인이었던 아버지의 직업을 이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일했던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회고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이 미국에 망명해 지성의 씨앗을 뿌려대던 시절에서 시작된다. 쉬프랭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판테온이란 출판사를 차리고 지적인 인문학 서적들을 펴냈다. 쉬프랭도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랜덤하우스가 인수한 판테온에 입사하여 출판 편집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도 아버지처럼 유럽과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회사의 이윤 압력에도 많은 고전과 지적이고 도전적인 책들을 판테온의 출판 목록에 끼워넣게 된다.

그의 ‘좋았던 시절’은 거대기업에 의한 출판사 인수·합병이라는 재난을 만난다. 1980년 미디어제국을 거느린 억만장자 뉴하우스가 판테온을 인수했다. 뉴하우스는 변하는 것은 없을 거라며 미소를 띠고 들어와 판테온의 전통을 산산이 해체해버린다. 거대기업의 출판사 장악은 우선 편집자의 주체성을 빼앗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제는 경영진과 재무 전문가들이 발행부수를 따져 출판목록을 정하는 심판관이 된다. 신뢰로 쌓아올린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는 출판 에이전트가 대신한다. 따라서 많은 출판사들은 책의 가능성을 저울질하지도 못한 채 작가 확보 경쟁에 뛰어들어 막대한 선인세를 지급할 처지에 놓인다. 이것은 역으로 출판사의 경영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이런 막나가는 상업화와 출판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도전적인 책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독립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독립 서점도 사망 선고를 받는다. 거대 할인서적 체인이 슬금슬금 진입해 저가 공세로 동네 서점들을 집어삼킨다. 이들은 철저히 이윤에 따라 책을 전시하기 때문에, 주인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책이 전시되던 가판대에는 베스트셀러 외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출판사들의 자체 검열은 더욱 정교하게 강화된다. 모기업의 경제적 이익에 흠집을 내는 책은 출판할 수 없다.


쉬프랭은 악전고투 끝에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판테온에 사표를 내고, 뉴프레스라는 독립 출판사를 세운다. 그는 황폐한 출판계의 대안으로 정부의 규제나 지원 프로그램, 인터넷을 통한 독립출판 등을 이야기하지만 그 희망이 그렇게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 역시 지적한다. 그는 ‘기업국가’인 미국에서 출판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휩싸여 있음을 얘기한다.

우리가 가끔 들르는 서점의 코너에 어떤 책들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들어와 있는지, 한권의 좋은 책에 서린 출판 편집자들의 고통은 무엇인지, 자본은 어떻게 독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비록 우리 출판계는 몇개 회사를 제외하고 거대기업의 먹잇감이 될 처지도 못 되지만, 이 책은 우리 출판계가 어느 순간 발을 헛디딜 수 있는 지점, 미래에 놓인 장애물들을 예고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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