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태생조차 알 수 없는 ‘살인무기’ 국방경비법… 법관님들에게는 ‘관습적으로’ 법이더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4년 10월21일 헌법재판소는 정부가 추진 중인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정부가 무리하게 법안을 추진하였다면 위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헌의 유일한 근거가 생소하기 짝이 없는 ‘관습 헌법’이라는 데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을 수 없다. 김영일 재판관처럼 헌법 72조의 국민투표권 침해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면 행정수도 이전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도 수긍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권위의 원천을 성문헌법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헌법 재판관들이 난데없이 관습 헌법과 <경국대전>을 들고 나와 대한민국의 성문헌법을 공격하는 꼴을 보니 자해공갈단을 본 것처럼 어처구니없다가도 자살테러단을 본 것처럼 짠해지기도 한다. 한달여전 본란에서 사법부가 수구세력의 보루로 나서게 되었다고 지적했지만(‘판사님, 판사님, 길들여진 판사님’) 이렇게까지 갈 줄은 몰랐다. 관습 헌법 이전에 ‘관습 형법’까지 들고 나와 죄형법정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판결을 내릴 때 본질을 알아봤어야 하는데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박정희
‘국방경비법’이란 무시무시한 ‘거시기’가 있었다. 왜 하필 ‘거시기’라 했냐 하면 이름에는 ‘법’이란 글자가 들어 있지만, 도저히 법이라 불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냐”라는 해묵은 논쟁도 있지만, 이 거시기는 그 논쟁의 대상도 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은 죄형법정주의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볼 때 이건 그냥 악법이 아니라 ‘법도 아니다’란 소리를 듣지만,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는 안 될 국가보안법이 국회에서 태어나는 과정을 목격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보안법은 악법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방경비법이란 ‘거시기’는 악법 중의 악법 국가보안법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처음부터 법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법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법률신문>의 추산에 의하면 이 법으로 처벌받은 사람이 16만명에서 20만명, 사형을 받은 사람은 추산하기조차 어렵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앞줄 사형, 뒷줄 무기”라는 전설과도 같은 재판인지 개판인지 모를 일이 ‘군법회의’란 이름으로 진행될 때, 그 군법회의의 설치 근거가 된 것도 국방경비법이란 거시기요, 집단적인 ‘사법 살인’의 흉기가 된 것도 바로 국방경비법이란 거시기였다.
이 법으로 처벌받은 사람들도 참 다양하다. 제주 4·3 사건 때 체포된 사람들 중 고등군법회의에서 이 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사형 384명을 포함해 모두 2530명인데 사형을 면한 사람들 대부분도 한국전쟁 당시 정부쪽에 의해 집단 학살됐다. ‘여순반란’ 사건의 수많은 관련자들이나 ‘여간첩’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김수임,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 중의 빨치산이나 ‘부역 행위’ 관련자 다수가 이 법 32조(이적)와 33조(간첩) 위반으로 처형됐다. 해방 직후 미군정 경무국 수사국장을 지냈으나 경찰 내에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을 항의했다 축출된 최능진도 제헌국회 선거에서 이승만에 도전한 괘씸죄 때문에 결국 이 법으로 처형됐고, 한국전쟁 당시 상부의 급박한 지시에 의해 한강철교를 폭파해야 했던 최창식 대령도 이 법 27조의 적전비행(敵前非行)죄로 총살됐다.
이 법으로 처벌받았지만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햇수로 45년, 세계 최장 기록의 징역을 살아야 했던 김선명 선생을 비롯하여 비전향 장기수의 3분의 1가량은 바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30년 넘는 징역을 살아야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에게도 정치 관여를 금지한 이 법 43조가 적용됐는데, 안두희가 한독당 비밀당원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 백범의 암살이 마치 한독당 내부의 알력 때문인 것처럼 조작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국방경비법으로 중형을 받았다가 사형되거나 옥중에서 학살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자는 역시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18조의 ‘폭동 또는 반란’ 항목이 적용되어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받았다. 흥미 있는 사실은 남로당이 군에 침투시킨 현역 최고의 프락치 박정희에게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33조의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박정희의 만주군·일본군 선배와 동료들이 이미 숙군에 협조한 그를 살려주기로 한 마당에 유죄로 인정될 때 사형밖에는 다른 형벌이 없는 간첩죄를 피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란죄가 적용되고도 이렇게 살아남은 박정희는 12년 뒤에 다시 반란을 범하고 만다. 그러고는 최고권력자가 되어 자신을 처벌했던 국방경비법을 폐지하고, 대신 ‘군형법’과 ‘군법회의법’을 제정하여 그 빈자리를 채웠다(1962).
버젓이 이름에 ‘법’이란 글자를 달고 있고, 이 법에 따라 십수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재판을 받았는데, 왜 이 법을 법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일까? 드라마만 보면 왜 밤낮 ‘출생의 비밀’이 나오는 것이냐고 평론가들은 불평하지만, 한국에 사는 한 어쩔 수 없다. 대한민국이 엄청난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나라이니까…. 대한민국의 출생의 비밀에서도 가장 피비린내 나는 비밀이 바로 태어나지 않은 국방경비법의 탄생이다.
각종 법령집을 보면 국방경비법과 그 동생 격인 해안경비법은 1948년 7월5일 공포(또는 공포 지시)되어 1948년 8월4일 효력이 발생한 법률 호수 미상의 법률이라고 쓰여 있다. 이 이상한 ‘법률’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출간된 법령집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1950년대 초반부터 나온 법령집에는 과도정부 법률 항목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가 있다.
군대도 없는데 군형법을 만들어?
그런데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과도정부 법률은 모두 12개인데, 마지막인 과도정부법률 12호는 과도정부의 입법기구인 ‘조선 과도 입법의원의 해산’을 규정한 것으로 입법의원이 1948년 5월20일 해산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방경비법이 7월5일에 공포됐는데, 그 한달 반 정도 전에 법을 통과시킬 조선 과도 입법의원은 해산된 것이다. 법에도 유복자가 있는 것인가? 아무리 유복자라 하더라도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태어나는 것이지, 어머니 돌아가신 뒤 한달 반 뒤에 태어나는 유복자는 없다. 법의 탈을 뒤집어쓴 이 허깨비의 정체를 밝히는 작업을 선구적으로 해온 조용환 변호사가 명쾌하게 지적한 대로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이란 “그것을 공포한 관보도 없고 미군정 스스로 만든 법령집에도 올라 있지 않고 미군정 스스로도 법령으로 인정한 일이 없는, 정체불명의 법령들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뒤 한국인들이 임의로 만든 법령집에 ‘남조선 과도정부 법률, 1948년 7월5일 공포 법령 호수 미상’이라는 허위의 정보를 달고 기재되어 법률로 시행돼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방경비법이란 처음에는 군형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군형법이 있으려면 먼저 군대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미군정하의 남조선은 독립된 국가가 아니었기에 군대를 가질 수 없었다. 1945년 11월 미군정은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산하에 군무국을 두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의 군대 창설 계획은 맥아더 사령부와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남북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군대 창설을 준비하게 된다면 상대방의 극심한 반발을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당국은 군대 창설을 준비했지만, 국방이 아니라 국내 치안과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경찰예비대(Korean Constabulary Reserve) 성격을 표방하게 된다. 1946년 1월 미군정은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발족시키지만, 그해 5월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게 되자 소련쪽은 당연히 ‘국방’이란 이름이 들어간 군사조직의 출현을 문제 삼았다. 미국으로서도 소련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1946년 6월15일 법령 86호에 의해 ‘국방부’를 ‘국내경비부’로 개칭하고 ‘군무국’은 폐지했으며, 남조선국방경비대는 국방이란 명칭을 빼고 ‘조선경비대’로 개칭하게 되었다(그러나 당시 언론에서는 계속 국방경비대란 말이 사용됐다).
국방경비법이란 거시기는 처음에는 남조선국방경비대가 군대로 정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상정하면서, 군형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준비된 것이다. 이 당시 미군정 군무국에서는 미국 육군의 전시법을 그대로 번역하여 이를 국방경비대의 군형법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내용은 미국 육군 전시법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되 명칭은 ‘국방경비법’인 초안이 준비됐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몇몇 법령집이나 군 자료집에 국방경비법이 전문 115조와 부표가 실려 있지 않고 50조까지만 실려 있는 점이다. 1961년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1960년판 <육군연감>이나 1967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한국전쟁사1> 등이 그런 사례인데, 국방경비법을 50조까지만 소개하면서 이하 생략의 표시도 없다. 51조부터는 군법회의에 관한 내용인데, 처음 초안이 준비되던 당시에는 미군정의 군법회의가 상설화돼 있었기 때문에 처음의 초안에는 군법회의에 관한 내용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4·3항쟁과 여순반란 때 살아나
국방경비대가 군대가 되지 못하고 명칭마저 조선경비대로 변경돼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군형법을 염두에 두고 준비된 국방경비법 법안이 승인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찰보다 강력한 장비와 인원을 가진 경비대가 경찰예비대로 묶여 있게 되면서 경찰과 경비대의 관계 설정과 경비대원의 신분 문제 등이 당연히 대두됐다. 1947년 2월1일 신문 보도를 보면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과 통위부장 유동열이 그동안 마찰을 빚어오던 경찰과 경비대의 임무 한계를 협의하여 발표했는데, 경비대는 비상시에 경찰을 원조할 수 있지만 평시에는 경찰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경비대원은 그들의 병영과 복무를 떠난 곳에서는 각 관공서와 같이 물론 제법령을 준수”한다고 되어 있다. 즉, 이들에 대한 별도의 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초안 상태로 서랍 속에서 잠자던 국방경비법이 살아난 것은 1948년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고 이어 10월에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난 뒤였다. 군대는 만들어놓았고 군사반란은 일어났는데, 그들을 처벌할 군형법은 만들어져 있지 않은 상황. 그리고 제주에서 일어난 주민들의 저항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정권이 미국의 신임을 받을 수 없는 상황. 무척 당혹스러운 상황이었겠지만, 당시 정부와 군 지도자들은 이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미군정하에서는 민간인도 당연히 군사재판소에 회부될 수 있었지만, 아직 법령 체계가 정비되지 못한 신생 대한민국에서는 ‘반란군’이나 제주의 무장세력을 군사재판에 회부할 법적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저항에 직면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법을 꺼내 쓸 수 있다면 군법회의 설치의 근거도 마련할 수 있고, 또 저항세력을 번거로운 3심제가 아니라 한번 재판으로 사형으로 날려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운영 주체들은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는 구형법과 구형사소송법에 의해 재판을 하든지, 아니면 소급입법의 부담을 지더라도 군형법을 제정하여 저항세력을 처벌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입법기구에서 심의된 적도 통과된 적도 공포된 적도 없는 초안에 불과한 국방경비법을 들고 나와 휘둘러댄 것이다.
국방경비법이 엄청난 문제를 갖고 있음은 군 당국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법으로서 공포되지 못한 ‘법’을 법령 체계 속에 끼워넣는 작업은 한국전쟁 중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부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된 족보 위조는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법률 체계에서도 행해진 것이다. 1951년 5월 국방부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이 펴낸 <군법교범>을 보면 “군형사법은 필히 국회를 통과하여 대통령이 승인 공포로 완전한 ‘법률’로서 제정되어야 함은 불요다언지사(不要多言之事)”이지만, “과도기 현상으로서 현 국방경비법은 당시 군정장관이 자기 직권으로서 ‘법령’의 형식으로 제정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군법무관이던 원세권도 1951년 간행된 <군법해설>이란 책에서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현재 방대한 양이 남아 있는 미군정의 관보나 내부 보고서, 그리고 당시 신문자료 어디를 보아도 1948년 7월을 전후하여 국방경비법이 개정되거나 공포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육군연감>에 이르러서는 족보의 ‘모록’(冒錄)이 절정에 달해 대부분의 법령집이 ‘법률 호수 미상’이라 하였던 것과는 달리 ‘법률 호수 177호’라고 기록되기에 이른다. 이 177호라 함은 국방경비법이 아니라 그 쌍둥이 동생 격인 해안경비법이 1951년 2월28일 일부 개정됐는데 그 법률 호수가 177호였을 뿐이다.
비적 무리 중 으뜸은 ‘법비’
이렇게 엉터리로 끼어든 법률 아닌 법률로 재판이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하다. 고등군법회의라 써붙인 법정에 한번 불려가 이름만 불린 사람들은 교도소로 가서야 방문의 자기 이름 옆에 써놓은 것을 보고서야 자신의 형량을 알거나, 교도관으로부터 “자기 형량도 모르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욕을 먹고서 형량을 얻어들었다. 4·3 사건과 관련하여 20년형을 선고받은 김춘배씨는 그가 복역하던 교도소가 파옥된 뒤 살아남았다가 5·16 뒤 검거되어 잔형을 복역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당시 군검찰은 군법회의 수형인명부를 증거로 제출했으나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는 전과자명부는 범행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증거가 아니라며 이를 근거로 형집행을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재승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4·3 사건의 재판은 국방경비법의 규정조차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자 있는 재판’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재판 불성립’에 해당한다고 한다.
조용환 변호사는 김선명 선생 등 장기수 3명을 대리하여 이렇게 말썽 많은 국방경비법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로 가져갔다. 이 과정에서 그가 준비한 <성문화된 관습 형법-‘국방경비법’의 인권 문제>는 너무나 명료하게 국방경비법은 법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물론 이와 같이 국가의 기간조직이 미처 형성되기 전의 비상 시기에, 오늘날의 통상적인 입법 과정으로 볼 수 있는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비상한 절차와 수단으로 법률이 제정되어 통용됐을 경우, 과연 그에 대해 법률로서의 효력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는 법철학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한 뒤, “적어도 그것이 오랫동안 우리나라 일반 국민에 의해 유효한 법률로 승인되어 그 규범력을 인정받아왔다면, 법적 안정성이라는 법의 이념의 요청에 비춰볼 때, 이제 와서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와 같은 혼란 시기에 오늘날과 같은 완벽한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였다는 흠을 들어 그 법률의 규범력을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대법원은 1998년에,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2001년에 국방경비법은 법이라고 판시했다.
국방경비법을 법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죄형법정주의도 법치주의도 모두 부인하는 일이다. 가장 엄격하게 관습법을 배척해야 할 형사법에서 관습법을 인용한 나라에서 관습 헌법이 등장한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국방경비법은 국가보안법은 물론 사회안전법을 거쳐 보안관찰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법률에 인용, 계승되는 형태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1930년대 만주는 온갖 비적이 판을 치던 비적의 나라였다. 마적, 토비(土匪), 공비, 병비(兵匪), 정치비(政治匪)…. 그런데 그 다양한 비적 무리 중에서 으뜸으로 친 것은 법을 들고 장난치는 법비(法匪)였다.

1946년 8월29일 ‘국치일’에 분열식을 하는 조선경비대. 원래 국방경비법은 남조선국방경비대가 군대로 발전하는 것을 상정하면서, 군형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준비된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의 3분의 1가량은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30년 넘게 징역을 살아야 했다(왼쪽).(사진 / 한겨레 황석주 기자) 이 법에 걸렸으나 극적으로 살아남아 다시 반란을 저지른 사람이 박정희였다.

국방경비법은 4·3항쟁과 여순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난데없이 살아났다. 1948년 여름 4·3항쟁 진압 작전에 나선 국방경비대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