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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학술] 근대 동아시아를 번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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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0-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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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다시, 동아시아!]

일본과 중국의 근대가 생산한 다종다양한 텍스트들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터줘야

▣ 정선태/ 연구공간 수유+너머 수석대표

지난 9월 초 내가 공부하고 있는 연구실에서는 ‘근대일본 사상을 번역한다’는 조금은 거창한 슬로건 아래 번역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 번역학교는 지난 몇년 동안 진행해왔던 ‘동아시아 근대성 세미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 특히 일본과 중국의 근대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는지를 체계적으로 공부해보자는 ‘순진한 발상’에서 출발한 동아시아 근대성 세미나는 4년여 만에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히고 말았다.


동아시아담론의 진정성을 위하여

어려움은 한국어로 번역된 근대 일본과 중국의 텍스트들을 샅샅이 뒤져 읽고 난 다음에 찾아왔다. 이제 더 이상 읽고 토론할 게 없었던 것이다. 읽고 싶고 또 읽어야 할 텍스트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번역된 것은 지극히 개론적인 수준의 글들이어서 우리의 지적 갈증을 풀어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사진 / epa)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하던 우리에게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본과 중국의 근대가 생산한 텍스트들을 직접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번역·출간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선회했다. 세미나팀을 재구성한 뒤 <메이로쿠잡지>(明六雜誌)를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874년에 간행되기 시작한 <메이로쿠잡지>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비롯해 니시 아마네(西周)와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등 근대 일본의 진로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지식인들이 대거 포진하여 논쟁을 벌인, 근대일본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텍스트이다. 처음엔 우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고, ‘만용’이 아니냐며 충고하는 친구도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우리는 현대 일본어와 사뭇 달라 낯설기까지 한 이 텍스트를 하나하나 풀어 옮기고 토론을 하면서 3분의 1가량의 번역을 마쳤다.

중국 베이징(맨 위)과 일본 도쿄(위)의 대형서점. 중국과 일본 근대사상의 다양한 텍스트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수적이다. (사진 / epa)

여기에서 용기를 얻은 우리는 좀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연구실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연구실 외부에서 우리의 작업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본 근대사상을 함께 공부하면서 번역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번역학교의 문을 연 동기였다. 처음 안내문을 공지할 때 느꼈던 일종의 불안은 예상치도 못했던 훌륭한 ‘학생’들이 찾아오면서 이내 사라졌다. 10년 이상 일본에서 메이지 초기 정치사상을 공부한 사람에서부터 오키나와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공과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로 진용을 갖춘 일본근대사상번역팀은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의 <삼취인경륜문답>(三醉人經綸問答)을 그 첫 번째 텍스트로 정하고 바로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매주 네 시간 가까이 각자 번역한 부분을 집중 토론하고 문장을 다듬으면서 모두가 스승이 되고 또 모두가 학생이 되어 ‘학습’을 진행하고 있는 중인데, 다음주쯤이면 본문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사실, 현재 암중모색 중인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은 아직 ‘선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식인들의 변죽을 울리는 선에서 그치는 ‘고공비행’만으로는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논의 수준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지금 모색 중인 한국발 동아시아 담론이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으려면 역사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근대는 아시아연대론에서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담론들을 생산해왔다.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이 활발한 논쟁의 장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의 근대가 생산한, 이질적인 사상들이 교차하는 텍스트들을 체계적으로 번역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번역된 텍스트를 근거로 하여 새로운 사상을 구성할 수 있을 때라야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은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학계는 왜 눈길도 주지 않는가

흔히 ‘번역된 근대’(translated modernity)라고 말하듯이 외부의 충격에 의해 근대의 길에 들어선 비서구권 국가들의 지식인들은 서양을 번역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번역을 통해 서양의 제도와 문화 그리고 습속까지 수용한 동아시아의 근대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과 중국이 앞장서서 직접 서양을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의 근대는 힘겨운 ‘투쟁’ 과정을 거쳐 그들만의 근대사상을 구축해왔다. 한국 역시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이들이 번역한 서양을 다시 번역하고 이를 근거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해왔다. 동아시아론이 하나의 대안적 사유를 제공할 수 있으려면 동아시아 3국의 번역과 근대사상의 형성 과정을 깊이 있게 탐색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번역이다! 일본과 중국 근대사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텍스트들이 번역될 때라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공유할 수 있으며, 번역된 텍스트들을 근거로 해야만 생산적인 논쟁도 진행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동아시아를 이야기하는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번역에 대한 우리 학계의 유치한 인식은 차치하고라도 동아시아론이라는 새로운 담론 구성의 중요성과 의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조차도 근대 동아시아 사상을 번역하는 문제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앞에서 말한 <메이로쿠잡지>와 <삼취인경륜문답>은 물론이고, 유길준이 한국 근대계몽기 담론장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서유견문>을 집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진지하게 참고한 고도쿠 슈스이의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 제국주의 일본 지식인의 조선과 중국관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요시노 사쿠조의 일련의 시론들 등 근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저술들을 독해했거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근대계몽기 국민국가 사상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량치차오의 <신민설>(新民說)을 비롯한 주요 저술들을 비롯해 중국 사회주의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리다자오와 천두슈 등의 저작들도 근대 중국을 이해하는 데 그 중요성을 누구나 인정함에도 직접 대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또 한국 근대 사상가들, 이를테면 김옥균·유길준·신채호·장지연·박은식 등의 글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중국과 일본의 근대사상가들은 읽지 않고 동아시아 담론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왼쪽부터 중국의 캉유웨이, 취추바이, 량치차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

이들 텍스트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번역 말고는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다. 한자문화권에 속한 까닭에 동아시아의 근대 지식인들은 별 어려움 없이 중국어나 일본어 그리고 한문을 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각국이 처한 상황에서,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독자적인 사상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자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본과 중국의 근대가 생산한 다종다양한 텍스트들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읽거나 번역을 통해 만나는 것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근대 동아시아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아서 읽으라고 말할 것인가.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번역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여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생산적인 논쟁은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 근대사에 근거를 둔 대안적 사유로서의 동아시아 담론 구성은 아전인수 격의 논리로 치달을 수밖에 없으며, 화려한 수사를 가면으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거나 은폐하는 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동아시아를 말하는 지식인들이 명심해야 할 점이다.

중-일의 근대 사상을 파악하지 못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일본과 중국의 근대는 한국의 근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판단, 그러니까 일본과 중국의 근대 사상의 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새로운 동아시아 담론을 재구성하지 못하는 한 동아시아를 둘러싼 논의들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우리는 번역학교의 문을 열었다. ‘제도의 지원’이 얼마나 요원한지를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겐 작지만 참으로 소중한 실험이다. 우리의 희망은 내년 2월까지 ‘예비훈련’을 거친 다음 번역학교를 확대 개편하여 매년 10권가량의 일본근대 사상 관련 번역서를 출간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돌발변수가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터이기에 지금 나로서는 이 꿈이 실현될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우리의 꾸준한 작업이 하나의 촉매가 되기를, 그리하여 동아시아 담론이 일회성 유행이 아닌 대안적인 사유로 나아가는 실마리가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www.spaceplus.or.kr 에 접속하면 자료실을 통해 이 글에서 말한 번역학교의 작업 진행 상황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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