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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황금빛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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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0-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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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 글 · 사진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 jeje@hani.co.kr

빈센트 반 고흐는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린 900여점의 유채화 가운데 고작 12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남겼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날까지 ‘해바라기의 화가’로 우리에게 더 잘 기억된다. 그가 해바라기를 많이 그린 때는 숫자부터가 팔팔 끓는 ‘1888’년이었다. 특히 그 유명한 <열네 송이 해바라기>(실은 열다섯 송이다)는 1888년 8월에 그렸다.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지 못해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는 고흐에게 해바라기 그림은 또 다른 자화상이었을 것이다.

(사진 / 한겨레 정남구 기자)

나도 고흐만큼이나 해바라기를 사랑한다. 최근 일부 연구가들은 고흐가 ‘압생트’라는 술을 많이 마셔 시신경이 손상되는 바람에 노란색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게 보이는 ‘황시증’을 앓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바라기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황시증을 앓지 않는 사람에게도 해바라기가 얼마나 찬란한 황금색인지를 잘 안다. 해바라기는 만지기에도 겁이 날 만큼 뜨겁다. 그리스 신화에서 해바라기는 태양신 아폴론을 짝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던 요정 크리티가 변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바라기에 ‘열렬한 사랑(애모)’이란 꽃말을 붙였고, 태양 가까운 고원지대에 사는 페루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나라꽃으로 삼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해바라기를 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씨앗 몇개만 있으면 키울 수 있었을 텐데, 왜 내가 그런 시도를 한번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주말농장을 시작하면서는 꼭 한번 해바라기를 심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올봄, 조카가 새 모이로 쓰던 씨앗 10여개를 얻어다가 밭 한쪽 끝에 심었다. 모두 싹이 나서 지난 여름의 햇볕을 무섭게 빨아들여 꽃을 피웠다. 해바라기 옆에 나팔꽃을 심었더니 나팔꽃 넝쿨이 해바라기를 감아올라 제법 잘 어울렸다.

조선 선비들은 해바라기(향일화)를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에 비유했다. 요즘엔 양지만 좇는 사람을 해바라기라고 한다. 요정 크리티는 정말로 해를 따라 돌까? 농장에 가서 오래 머물게 될 때마다 해바라기를 관찰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몇 시간 간격으로 사진을 찍어봤다. 잘 보면, 이파리 끝이 늘 해를 향해 뻗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바라기는 광합성을 활발히 하기 위해 잎이 태양빛을 정면으로 받을 수 있도록 움직인다. 광합성을 계속하는 꽃봉오리도 무거워지기 전까지는 해를 따라 돈다. 하지만 정작 꽃은 광합성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해를 따라 돌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국화과에 속하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꽃이다. 국화과의 꽃들은 가운데에 수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 있고, 바깥 부분에 혀꽃(설상화)이 퍼져 있다. 가운데에 많은 씨앗이 맺히는 것은 그래서다. 큰 해바라기는 많으면 2천개까지도 씨앗이 맺힌다고 한다. 꽃과 씨앗의 기하학적 배열도 눈길을 끈다. 우리 밭에서는 익은 씨앗이 자꾸 쏟아져서 얼마 전 해바라기를 거뒀다. 토실토실한 씨앗에 마치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는데, 까보니 속이 빈 것이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칼리 거름이 부족했던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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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