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들의 아지트 갤러리 피쉬… 미술사 변두리 습작 넘어 섬세함 살린 드로잉 기획전들 돋보여
▣ 유경희/ 미술평론가
20세기 초·중반 서구 예술가들의 토론과 회합의 장소로서 갤러리와 카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어디서 모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궁금해할 것이다. 실상 오늘날 미술인들이 모이는 특정 장소는 거의 부재하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미술가들은 상호 교류의 필요성이라든지 다른 세계와의 접촉을 꿈꾸는 장으로서 특정한 공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일까.
큐레이터의 애정으로 일군 사랑방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 때 생각나는 공간이 바로 ‘갤러리피쉬’다. 인사동에 가면 꼭 들르는 공간, 그곳에 가면 늘 몇명의 낯익은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이곳과 인연이 깊은 젊은 작가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곳을 거의 아지트처럼 이용하고 있다. 물론 이곳은 20세기 다다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열정적 토론과 치열한 담론이 오가던 카페와는 좀 거리가 있다. 하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의 사유와 고민들이 토로되는, 요즘으로서는 보기 드문 공간 중 하나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갤러리피쉬의 이런 성향은 바로 그곳의 큐레이터인 원혜진씨의 안목과 취향 때문이다. 미국의 메릴랜드 인스티튜트 컬리지 오브 아트에서 회화를, 영국의 생마틴 미술학교에서 유리공예를 전공한 그녀가 2001년 개관한 갤러리피쉬는 상업화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왠지 대안공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은 판매와 무관해(?) 보이는 젊은 작가들의 기획전이 주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30~40대의 젊은 작가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의 개념적이고 실험적이며 난해한 작품들을 딜링할 수 있는 상업화랑을 구상했지만, 미술시장의 구조가 일천하고 열악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매우 소원한 일임을 절감하게 된다. 따라서 부득이하게 대안공간에 버금가는 분위기로 전환돼갔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갤러리피쉬가 예술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내는 것은 원혜진 큐레이터만의 대인관계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 화랑엔 왜 젊은 작가들이 늘 진을 치고 있으며 주로 어떤 작가들이 드나드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우선 인간성!’이라고 웃으며 말하면서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안 되고, 사람 좋은 게 최고’라고 농담처럼 뼈 있는 답변을 한다. 재주가 덕을 넘지 못한다는 것을 터득한 모양이다. 나 역시 그곳에서 만나는 작가들에 대한 호감 때문에 그곳을 자주 방문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곳에 가면 거의 날 실망시키지 않는 전시들이 있다는 믿음이 더욱 잦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는 드로잉 전시는 드로잉에 대한 큐레이터의 애정과 관심 그리고 독특한 안목과 기획력이 묻어나오는 섬세한 전시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진행돼온 드로잉 전시를 통해서, 보통 드로잉 하면 떠오르는, 그러니까 원작을 위한 습작처럼 여겨지는 의미와 더불어 미술사의 변두리에서 푸대접을 받아온 사소한 장르로서의 드로잉이라는 편견이 불식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드로잉을 만만한 장르로 대했다간 큰코 다친다는 말이다. ‘섬광’은 ‘번개’와도 같은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말에 마감한 김을 드로잉전 ‘I like drawing’만 해도 그렇다. 어쩐 일인지 나는 우연과 필연이 겹쳐 김을의 이 전시를 다섯번쯤 보았다. 그의 드로잉은 단 몇분 만에 관람을 마치도록 배려하고 있지 않다. 화랑벽에 설치된 드로잉은 그렇다치고, 진열대 위에 놓인 10개가 넘는 드로잉북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선 꽤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며칠을 나누어 3년 동안의 드로잉 전작을 훔쳐본 나는 옆 관객의 눈치를 보아가며 ‘거의, 진짜, 너무’ 오랜만에 깔깔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의 진한 감동 역시 흔한 일은 아니었다.
요즘 미술에서 아무리 ‘재미’(fun)의 요소가 매우 중요해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드로잉은 그런 의식적인 재미의 요소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본질을 건드리되, 너무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게, 정공법이 아니라 우회하여 넌지시 그러나 날카롭게 풍자하는 것이다. 이처럼 드로잉은 김을에게 전방위적 사유와 실험을 가능케 하는 창작으로서 각인됐고, 그런 애정을 담은 드로잉전을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매년 개최해오고 있는 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3년간의 작업을 총결산하는 의미로 문예진흥원의 지원으로 꽤 묵직한 드로잉집을 만들기도 했다. 김을은 또한 김목수로도 통할 만큼 솜씨가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가 지은 집에서 사는 행운의 작가들도 있다.
김을·김태헌 등… 드로잉이 부활하는 이유
바로 김태헌이 그 행운의 주인공인데, 그 역시 지난 7월 ‘김씨의 하루’라는 전시를 가졌다. 2003년 몽골과 중국을 여행한 뒤 그린 그림과 글을 위주로 한 이 기획전은 작가 특유의 뛰어난 드로잉 솜씨, 디테일한 묘사와 더불어 뛰어난 서정적 문기(文氣)를 느낄 수 있는 전시였다. 그것은 마치 시적 상상력과 조형적 상상력이 조우하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전시로 기억된다. 눈길을 끌었던 전시는 비단 그뿐이 아니다.
갤러리피쉬의 본격적인 드로잉전의 시발점은 아마도 ‘다섯 사람 여행도’전부터일 것이다. 이 여행도는 강경구·안창홍·김성호·김을·김지원 등 친분이 있는 작가 다섯 사람이 인도의 뭄바이, 아잔타, 조드푸르, 자이살메르, 타르사막, 바라나시 등 여행에서 가져온 드로잉과 회화들로 구성된 전시다. 이 여행에서 그들은 오인오색 다른 이미지와 메시지로 관객들을 유혹했다. 그 다음으로는 ‘스으윽’이라는 전시다. 이 전시는 김학량(작가 겸 큐레이터), 배종헌(작가), 이관훈(큐레이터) 등이 함께 꾸민 전시로 제목만큼이나 좀 은근슬쩍 모르고 지나갈 성싶은 음험한(?) 전시다. 자기들 말로는 애써 고안한 이슈나 개념을 가지고 접근한 전시가 아니며, 세상의 숨결을 더듬으며 느슨하고 더디게 토해낸 한 숨쯤이라고 했지만, 그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게 이 전시의 존재 이유다.
갤러리피쉬에서 진행돼온 드로잉전은, 큐레이터의 성향과 기획력과 그곳을 사랑하는 작가들의 의기투합이라는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산물이다. 그렇다면 왜 21세기에 드로잉을 화두로 삼는가. 그것은 20세기 포스트모던의 ‘저자의 죽음’이라는 허망한 이념이 더 이상 우리의 담론이 아님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다. 이 말은 드로잉이라는 장르를 통해 작가들이 바로 ‘작가 자신인 것’ ‘작가 그 자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순진한(?) 확신 때문이다. 작가 자신이 자신에게 행하는 성찰적 사유의 시발점으로서 드로잉이 서서히 부활하고 있음은 그것만이 주는 섬광과도 같은 위트와 유머, 그리고 패러독스라는 은유적 사건에 대한 근원적 갈증 때문은 아닐까.
큐레이터의 애정으로 일군 사랑방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서울 인사동의 '갤러리 피쉬'(맨위). 이곳의 전시 작품은 드로잉이 어엿한 미술 장르임을 실감케 한다.(위)

김을의 <우주를 밟은 발>

김태현의 <중국의 하얀 아침>

김지원의 <풍경>

김학량의 <광화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