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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꽃나무를 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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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10-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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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전우익 선생의 깨우침을 얻은 뒤 나섰던 종로5가 종묘상 나들이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세상에는 들어야 할 말이 그다지 많지 않다 하였으니 가능하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내 세계가 붕괴되지 않고 겨우 유지되고 있는 것도 실은 그런 얄미운 시청각 능력 덕이기도 했다.


그래도 본의 아니게 보고 싶지 않은 걸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난주에 ‘꽃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글 말미에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꽃이나 나무에 대한 감식안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썼는데, 누군가 인터넷 게시판 토론장에 이런 꼬리말을 붙여놓은 걸 봤다.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 어이쿠! 여자로 태어난 게 벼슬이구나.”

늦여름부터 시작해 겨울까지 피는 리틀젬. 목련과 태산목의 한 품종. (사진/ 고규홍)

별로 마음 상할 만한 지적은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여자로 태어난 걸 천벌처럼 여기는 것보다 벼슬처럼 여기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이고, 두 번째 여자든 남자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저 홀로 고립과 냉소 속에서 전혀 노력하지 않는 자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세 번째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버지 직함이나 자신의 졸업장 따위를 들먹이는 남자보다는 차라리 꽃에 대한 감식안으로 승부하는 남자가 훨씬 덜 저급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런 독자도 있었다. 메일로 자신은 “꽃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문외한 남자”라고 소개하고는 “꽃에 대한 감식안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좀 알려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내가 꽃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몇자 적었다.

“글쎄요. 처음엔 그저 꽃과 나무의 적막한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알았던 옛날 사내들이 근사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댁의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디다’라고 시작하던 김용준 선생의 <근원수필>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생각해보니 전우익 선생의 <사람이 뭔데>가 먼저였던 것 같습니다. <근원수필>도 전우익 선생의 책을 보고 알았으니까요. 작년, 혹은 재작년에 심었던 나무들의 근황을, 혼자 보기 아까운 올해 핀 함박꽃의 아름다움을, 그것들을 보며 느낀 귀한 깨우침을 예를 갖춘 소박한 문장으로 알려주시던 전우익 선생의 글을 읽고 반하게 된 거죠. 그래서 선생의 삶을 따라한답시고 종로5가 종묘상에 나가 함박꽃 묘종이나 동백나무 같은 걸 사다가 콘크리트 마당에 들여놓고는 꽃 한번 못 피우고 죄다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랬다. 처음엔 책을 읽었고 그 다음엔 꽃나무를 사들였다. 그때부터 내게는 빵집보다는 꽃집이 더 익숙해졌고 특별한 일이 없어도 나 자신이나 친구들에게 꽃 선물하는 일을 즐기게 됐다. 종종 콘크리리트 마당밖에 없는 인생이 저주스러웠지만 다행히도 그 즈음에 김훈 선생의 책을 읽고는 내 것이 아닌 꽃나무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틈틈이 이웃집 꽃나무들의 근황을 살피는가 하면 어떤 날 저녁 무렵엔 메타세콰이어를 보기 위해 괜스레 종로타워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멀리 천리포 수목원(이곳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중 하나다)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문득 천리포 수목원에서 처음 만났던 고규홍 선배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는 한때 일간지 기자로 10년을 살고 몇년 전부터는 천리포 수목원의 파수꾼으로, 또 나무를 찾아 전국의 산과 들을 헤매는 아마추어 식물학자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선배, 지금쯤 천리포엔 한겨울까지 핀다는 목련 리틀젬이 한창이겠네요. 소식 좀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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