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깨물고 “부숴버리겠어”하는 여자는 옛말… <여자만세>와 <아줌마>에서 달라진 여자의 복수
단물 쓴물 다 빨고 나니 이제와서 나를 버린다고 한다. 돈많고 젊은 새 여자가 생겼다고 해서. 자기만 바라보고 살아온 내 인생은 엉망진창인데.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건 고래의 진리다. 잘 나가는 남자가 버림받은 여자에게 망가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재미진가. 그래서 여자의 소름끼치는 복수는 드라마의 모티브로서 사랑받아왔다. 김희애는 <내일 잊으리>에서 임채무를 부도에 이르게 했고, 심은하는 <청춘의 덫>에서 이종원의 인생을 망쳐놨다.
그러나 현실에서 평범한 여자가 심은하나 김희애처럼 철저하게 밟히는 일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당신, 부숴버리겠어”라는 심은하의 명대사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아이를 잃는다는 모진 불행이 있어야 했다. 우유부단한 우리네는 우유부단한 식으로 헤어진다. “그래도 그 남자,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라는 식의 미련을 남기면서. 그럼 이걸 어떤 식으로 복수해야 하는가.
<여자만세>(서울방송, 수·목 밤 9시55분∼11시5분)는 “잘사는 게 복수다”라고 답한다. 전체 16회분 중에서 이제 겨우 6회분이 방영되었는데도 이 프로그램은 현재 시청률 32.3%(AC 닐슨 코리아 집계)로 드라마 시청률 3위를 달리고 있다. 드라마 시청률 1, 2위를 한국방송공사가 차지하고 있는 판에 <여자만세>는 서울방송 드라마국의 효자랄 수 있다.
채시라가 망가졌다?
서른을 일년 앞둔 여자 다영(채시라)이 열여덟 꽃다운 나이부터 현재까지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때는 남자들이 줄줄 따르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제는 결혼만이 희망일 뿐. 직장은 재미없고 친구들은 다 시집가서 잘산다. 그런데 자기가 먼저 좋대서 7년 동안 사귄 남자 정석(변우민)은 결혼하자더니 사장 딸과 눈이 맞았다. 같은 회사에 다니니 연애하는 것도 소문내지 말자 했는데 알고 보니 사장 딸 난희(박소현)와 사귀기 위한 것이었다. 울고불고 매달려보지만 나한테만 목맨 여자는 싫다는 것이다. 한편 벤처에 취직해서 잘 나가는 동생(채림)은 남자랑 문제 좀 있다고 이 난리냐며 속을 긁는다. 설상가상으로 집에서는 시집가라고 압력, 사장 딸은 다영이가 회사를 나갔으면 좋겠다고 압력이다. 결국 다영은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오고, 정석이만 바라보던 생활과는 다른 자세로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원룸을 얻고, 동생이 쓰다남은 노트북을 얻고, 정석에게 빌려준 돈을 얼마간 받아 다영은 혼자 생활을 시작한다. 채시라는 98년 <왕과 비>에서 할머니 인수대비 역을 맡아 이미지보다 연기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인 데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화장도 제대로 안 한 노처녀 역을 열연해 호평받고 있다. “난 연기자다. 연기자가 우아하게 보이려고 작품을 고른다면 그만큼 자기 세계가 좁아지는 게 아닌가”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인터넷상에서는 “채시라가 망가졌다”는 항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몸을 던진 연기에 지지표를 던지는 편이다.
맨얼굴의 연기자, 별 능력없는 여자의 평범한 실연 이야기. <여자만세>는 이렇게 여러 가지 면에서 <청춘의 덫> 같은 근사한 복수극과는 궤를 달리 한다. 그러나 최근 드라마에서는 남자에게 채인 여자의 서늘한 복수보다는 오히려 유쾌한 재기(再起)를 선호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여자만세>에서는 유난히 코믹한 장면이 많다. 신혼여행에 ‘깽판’을 놓으려고 제주도로 쫓아갔던 다영은 정석과 난희가 묵은 방을 염탐하다가 베란다에서 떨어질 뻔하고, 정석의 자동차인 줄 알고 엉뚱한 차에 펑크를 내기도 한다. 결코 우아하지만은 않게, 그렇지만 열심히 자기 갈 길을 가는 게 다영이다.
역시 코미디풍인 문화방송의 월화드라마 <아줌마>에서도 장진구(강석우)와 한지원(심혜진)이 바람나자 오삼숙(원미경)은 신세한탄에 그치지 않고 당당하게 위자료를 요구한다. 재미있는 것은 다영 역할을 맡고 있는 채시라는 95년 <아들의 여자>에서, 삼숙 역할을 맡고 있는 원미경은 89년 <행복한 여자>에서 버림받은 여자 역할을 연기했다는 것이다. 원미경은 피아니스트 여경(황신혜 분)에게 남편 재섭(이덕화 분)을 뺏긴 순임을 연기했다. 그러나 위자료가 든 가방을 붙들고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던 80년대 순임은 없다. 갈테면 가라며 당당한 2000년대 아줌마 삼숙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 만큼 배반당한 여자들이 보여주는 행동도 달라졌다. <아들의 여자>에서 채원(채시라 분)은 복수를 위해 옛 사랑의 형인 태원(정보석 분)을 유혹하지만, <여자만세>의 다영은 정석의 가정을 파괴하거나 사업을 망하게 할 시간에 일어학원이니 홈패션 학원을 다닌다. 채시라는 이에 대해 “다영이는 그냥 자기 갈 길을 가는데 상황이 남자에게 복수를 해주는 것 같다”며 웃는다. 원미경 역시 위재료가 든 가방을 붙들고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던 <행복한 여자>에서의 옛날 모습은 없다.
인터넷과 책도 ‘유쾌한 복수’ 열풍
이런 추세에 발맞춰 유쾌한 복수에 대한 책도 각광을 받고 있다. <다른 남자를 꿈꾸는 여자>의 저자 에바 헬러가 지은 <복수한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열린책들 펴냄)는 한국시장에 출시된 지 한달 만에 8천부를 팔면서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를 장식하고 있다. 독일 여성이 쓴 이 책은 이기적인 남자 미하엘에게 버림받은 지빌레가 복수하는 과정을 코믹터치로 그렸다. 인터넷에서도 여자들을 응원하는 사이트가 넘쳐난다. 마이클럽(www.miclub.com), 아이지아(www.izia.com), 김대리(www.kimdaeri.com) 등 이른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자들의 하소연을 적는 상담란이 인기다. 이런 사이트의 특징은 네티즌들이 직접 상담을 해준다는 것인데, 네티즌들의 상담은 생각외로 자상하고 현실적이다. 한번 배신당하면 여자 인생 끝장이라는 사고는 찾아볼 수 없다. 십년 전 만해도 생판 남에게 말할 수도 없고 상담받기도 어려웠던 이야기들이 만인시하에서 떠돈다는 점에서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남녀관을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다영은 어떻게 될까? 그는 나중에 여행업에 뛰어들어서 성공을 거두는 반면, 정석은 결국 난희와 이혼을 하게 된다. 지나치게 독단적인 난희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영을 잊지 못해서다. 이혼 뒤 정석은 다영과 다시 결합하려 하지만 다영은 이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다영은 혁과 결혼할까? 제작진은 “시청자들이 상상하도록 미지수로 남겨놓겠다”라고 말한다. ‘그래도 여자는 새 남자를 잡아야만 행복이 완성되는데’, 하고 조바심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좋은 친구로 지내든, 둘이 맺어지든간에 이미 충분히 복수했고 혼자서도 즐거우니까.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사진/<여자만세>.)

(사진/<아줌마>.)
인터뷰/<여자만세>의 오세강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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