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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위험한 패권, DNA 독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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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7-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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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결정론에 바탕해 기계론적 생명 이해… 생로병사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사진/인간 유전체 분석에 쓰이는 샘플)
지난 6월26일 전세계는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실질적 완성이라는 이른바 ‘역사적 발표’를 둘러싸고 한바탕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작 발표된 것은 인간게놈지도의 97%, 전체 염기서열의 85%에 해당하는 초안(working draft)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왜 아직 게놈프로젝트가 다 완성되지도 않은 어정쩡한 시점에서 발표를 서둘러야 했는지 의아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염기서열 85% 규명하고 서둘러 발표

영국에서 발간된 과학잡지 <뉴 사이언티스트> 7월1일자는 편집자 사설에서 이번에 발표된 게놈 초안을 1601년에 티코 브라헤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상세한 관측결과에 비유했다. 뒷날 케플러가 그가 남긴 관측결과를 이용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행성운동에 대한 법칙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케플러의 법칙과 그의 수학적 방법은 이후 뉴턴이 역학적 세계관을 완성시키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 그 대상이 우주라는 거시세계와 DNA라는 미시세계라는 점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브라헤의 관측결과와 게놈지도는 모두 미완의 관찰결과이며 후속 연구에 따라 우리의 세계관을 크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진/"이젠 DNA 패권을 장악하라."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블레어 영국 총리가 인공위성을 통한 회견에서 게놈지도 초안 완성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게놈지도는 이미 염기서열에 대한 분석이 시작된 1989년부터 이미 그 결과와 판매시장, 파급효과 등을 두루 ‘예견’하고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브라헤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이 진행되던 10년 남짓한 기간 내내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과학자와 과학전문기자, 언론 등이 쏟아낸 온갖 예상을 미리 온몸에 칭칭 감으면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이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해준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구조 발견이 이뤄진 1953년의 50주년이 되는 2003년에 완성될 예정이었지만, 염기서열 해석기술의 발달로 그 이전에 완성되리라는 거의 강요에 가까운 예견이 워낙 무성하던 터라 마치 선지자의 예언을 서둘러 실행하듯 과감하게 초안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몇해 전 화성 운석에서 생명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부터 잘 나타났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과학이 갖는 귄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지난번 화성운석 때에도 철저한 정보통제와 발표시기 선택을 거쳤듯이 이번 발표 역시 누가 보더라도 철저한 준비를 거쳐 극적인 효과를 노린 정교하게 안무된 의식(儀式)이었다. 클린턴과 블레어는 인공위성으로 연결된 화려한 회견을 통해 게놈지도의 초안 발표를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끌어올렸다.

이 날의 발표는 그동안 게놈프로젝트를 주도했던 미국을 비롯한 일부 선진국들이 전세계를 상대로 자신들의 권위를 기초로 게놈, 나아가 DNA에 초국적 권위와 힘을 부여한 공식적 선언이었다. 그 직후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언론사들 사이에서 게놈이 맞느냐 지놈이 맞느냐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고,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관장하는 한 부서에서 공식적인 명칭을 선정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그것은 6월26일 선언으로 게놈(또는 지놈)이 우리나라에서도 확실한 권력을 획득했다는 뚜렷한 신호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새로운 천년대와 함께 ‘DNA 독트린’이라는 과거에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패권주의가 시작되는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6월26일 발표 이후 전세계와 국내의 언론에서는 “바퀴의 발명을 뛰어넘는 위대한 성과”(영국), “질병극복 신기원 열었다”, “생로병사의 비밀이 풀리다”(국내) 등 DNA 찬양 일변도의 한목소리만 나왔고, 몇몇 시민운동가들이 윤리적 문제를 언급했을 뿐 그 많은 과학자들 중에서 아무도 현재의 양상이 자칫 DNA 패권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DNA 독트린의 핵심은 유전자 결정론

(사진/게놈지도를 만드는 셀레라제노믹스의 연구원들이 유전체 정보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도대체 미국이 앞장서서 파급시키고 있는 DNA 독트린의 등뼈라 할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genetic determinism)이다. 유전자 결정론이란 말 그대로 유전자를 해석하기만 하면 인간을 비롯해서 생물과 생명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고, 나아가 재조합을 통해 그동안 신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생명의 변형과 창조까지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유전자 결정론이 어제오늘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서양의 과학적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생물기계(beast machine) 관점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DNA 독트린은 ‘유전자=인간’, ‘DNA=생명’이라는 교의이다. 이 교의와 함께 유전자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의 설계도이고, 기계의 설계도를 알면 그 기계를 모두 알 수 있듯이 유전자 설계도를 해독하면 생명의 신비를 모두 풀 수 있다는 환원론이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게놈 관련보도의 키워드들 중에 ‘설계도, 해독, 재조합, 조작, 변형’ 등의 기계론적 용어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유전자 안에 없다”는 주장을 제기했던 소수의 생물학자들 중 한사람인 R. C. 르원틴이 이라는 저서에서 말했듯이, 유전자 결정론은 부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현대과학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처럼 우리는 DNA라는 자기-복제 분자들의 일시적인 운반수단일 뿐이며, 우리는 허울에 불과하고 사실은 DNA가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운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치닫게 된다.

유전자의 상업적 이용 위한 터닦기

(사진/게놈지도의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 모습)
그렇다면 왜 이런 독트린이 필요한가.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뒤따라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유전자 상업화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만을 이야기하겠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게놈프로젝트는 미리 예상된 시장 규모를 염두에 두고 수십억 달러의 연구비를 쏟아부은 연구계획이었다. 그러나 최근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한 유럽과 제3세계의 반대와 같은 초기에 예상치 못한 복병들이 등장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게놈프로젝트의 주역들은 DNA에 대한 더욱 강력한 믿음을 불어넣을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게놈지도의 초안을 작성한 것이 마치 “생명의 신비를 풀고”, “질병극복의 신기원에 도달하는” 길을 연 것인 양 과장하는 DNA 거품들이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게놈지도가 과연 암과 같은 질병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 생로병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지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김동광/ 과학평론가·과학세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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