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도도한 파리지엔

526
등록 : 2004-09-09 00:00 수정 :

크게 작게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프렌치 룩’에 끄떡없는 그녀들의 진정한 프렌치 스타일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프랑스 여자들을 흠모하지만 파리지엔느 운운하는 사람들은 조금도 신용하지 않는다. 파리나 패션에 대해서 잘 안다는 부류들이 떠드는 프렌치 스타일이라는 것도 그렇다. ‘애쓰지 않고도 멋이 나는 편안한 룩’이라는 프렌치 스타일은 한편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역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우리처럼 다리 짧고 얼굴 크고 머리카락까지 뻣뻣한 동양 여자들에게 그것은 슈퍼모델의 허리 사이즈만큼이나 이룰 수 없는 목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민하고도 관능적인 프랑스 여배우 에마뉘엘 베아르.
그런데 요즘 이 프렌치 스타일이 새삼스럽게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그 이유는 알 만하다. 대도시의 여자들이 파자마 따위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었던 몇몇 디자이너들이 클래식하고 퇴폐적이면서도 동시에 캐주얼한 프렌치 룩이라는 카드로 들이민 것이다. 이번 시즌 루이뷔통이나 샤넬, 에르메스가 선보인 프렌치 룩은 매력적이고 도도한 레이디 같으면서도 ‘방치된 소녀’처럼 흐트러져 보이기 때문에 여전히 쿨해 보인다. 한마디로 멋지고 근사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자기만의 멋을 즐기는 진짜 프랑스 여자라면 그러한 트렌드에 대해서 눈곱만큼도 흥미를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하다. 프랑스 여자들은 내적인 자기 만족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자존심이 유행이나 명품에 휘둘리는 걸 허락하질 않는다. 어쩌면 ‘그럴듯한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을 흉내낸다고 프랑스 여자처럼 보일 수 있는 건 아니’라며 지금쯤 프랑스 이곳저곳에서 프렌치 트렌드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기는 한가하게 유행이나 타인들의 공허한 잡음에 대해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면서 도도하게 프루스트의 책장을 탐닉할 여자들이 바로 프랑스 여자다. 그들은 타고난 미모보다 그 미모에 어울리는 지성을 갈고닦는 데 더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은 그런 자신들에게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그럼에도 배우고 익힐 만한 프렌치 스타일의 정수라는 게 있긴 있었다. 나는 그걸 프랑스에서 10년 이상 산 저널리스트 데브라 올리비에가 쓴 <여성 그 기분 좋고 살아 있는 느낌>이라는 책 속에서 발견했다. 일단 그들은 나처럼 백화점 바겐세일이나 동대문 보세점에서 별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옷을 싸다는 이유로 허겁지겁 집어드는 ‘천박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로 마음에 드는 최고 품질의 옷을 엄청나게 가려서 샀다. 몇벌 안 되는 옷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든다.

무엇보다 놀라운 발견은 그들은 우리처럼 관계 뒤 욕실로 향할 때 가운이나 셔츠로 몸을 가리지 않는다는 거다.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욕실로 향한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의 결론이 또다시 ‘그쪽’으로 향한다고 책망하겠지만 사실 이건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정신이 자유로운 그들은 벌거벗고 당당하게 돌아다닌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프랑스 여자들이 다른 어떤 부류보다 관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그래야만 한다는 걸 서른이 다 되어서야 알았지만 그들은 어릴 때부터 교과서나 화폐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프랑스의 자유를 대변하기 위해서 가슴을 반쯤 드러내놓은 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마리안의 그림이나 동상을 보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 같은 여자는 말로만 멋지게 차려입고 시위에 나가라는 뻔뻔스러운 글을 쓰고, 프랑스 여자들은 하이힐을 신고서라도 말 없이 시위에 나가 인간의 권리를 외친다. 생 베르나르 교회 사건의 현장에 제 발로 찾아간 에마뉘엘 베아르처럼 말이다. 그래서 기가 죽는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