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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들은 정말로 돌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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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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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것… 밀란 쿤데라 신작에서 되풀이되는 ‘망명’과 ‘귀환’의 모티프


밀란 쿤데라의 신작 장편소설 향수(원제:L'Ignorance, 8천원)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체코 출신의 프랑스 망명작가인 그가 프랑스 현지에서보다 한국에서 먼저 책을 선보인 것을 이례적인 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78년), <불멸>(1990년), <느림>(1994년)등 문제작을 통해 현대사회속의 인간을 집요하게 탐구해온 쿤데라의 신작을 문학평론가 이명원씨의 눈을 통해 살펴본다. 편집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폴 오스터 등과 함께 국내에도 두꺼운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는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향수>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에서 쿤데라는 이레나와 조제프라는 두 망명객을 통해, 흥미로운 ‘귀환의 서사시’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이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들의 귀환이 상실된 추억을 복원시키기보다는 서늘한 통증을 확대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통념을 뒤집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주요한 서사적 모티프로 가동되고 있는 것은 ‘망명’이다. 왜 쿤데라는 망명이라는 모티프를 이 소설에서 주요한 서사적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 이 소설의 핵심적인 비밀이 숨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서사적 장치는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세계사에 대한, 존재방식에 대한 은유

우선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망명’의 모티프가 20세기의 세계사에 대한 효과적인 은유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20세기가 특징적인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한 이념을 선택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던 시기였다는 점에 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진행되기 시작한 소비에트 블록의 점진적 확산은, 이후 냉전기를 거치면서 이념의 대립을 극대화시켰거니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기점으로 급진적인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진행과정은 각각의 개인들에게 자신이 몸담아야 할 이념과 체제의 선택을 강요하였고, 그 결과 주어진 이념과 체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일군의 사람들에게 ‘정치적 망명자’라는 낯선 운명에 봉착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망명’이라는 모티프야말로 20세기의 역사에 대한 쿤데라식 은유인 셈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이 망명의 모티프가 ‘떠남과 되돌아옴’이라는 신화적 인간조건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숙하고 다정한 삶의 내부에서, 낯설고도 두려운 외부를 향해 뛰쳐나가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성숙의 드라마’이다. 그때 ‘항해’로 은유화되는 신화 속의 움직임은 성숙한 삶의 완성에 도달하려는 주체의 자기갱신 욕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항해의 끝에는 ‘귀환의 드라마’가 펼쳐지게 마련이다. 항해가 인간존재의 외부적 힘과의 대결과정을 통해 성숙에 이르는 길이라면, 귀환은 성숙한 육체와 정신이 평화로운 휴식에 자신을 가탁하는 길이다. 이 원심력과 구심력의 상호작용의 강도가 인간 삶의 내용물을 결정한다.

<향수>에서 주요인물들이 ‘망명객’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두 가지 조건과 관련하여 검토하게 되면, 이 소설의 의도와 결과는 좀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에 쿤데라의 <향수>를 읽어나가다보면,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흔히 ‘양가감정’이라고 일컫는 정서적 상황에 봉착할 듯싶다. 그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이 소설의 두 가지 의도 때문에 그렇다. 우선 독자들은 쿤데라가 작중 화자를 통해 진술하고 있는 20세기의 역사에 대한 관점이 때때로 지극히 단순하고 도식적인 레드콤플렉스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다. 그것은 이 소설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역사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많은 부분 “자본주의=선, 공산주의=악”과 같은 형식의 단순한 이분법의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쿤데라 개인의 생각이며, 작중의 중요한 두 인물이 소비에트의 체코 침공 이후, 자유를 찾아 서유럽으로 망명한 사람들로 설정되어 있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쿤데라의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양가감정’에 빠질 수 있는 또다른 이유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의 작가의 선명한 인식과는 별도로, 이 소설이 ‘망명’의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기억의 현상학’이라는 문제를 매우 유려한 문체와 철학적 사변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내 생각에 <향수>가 가지고 있는 소설로서의 가장 큰 미덕은 이러한 측면에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의 논의가 후자의 측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가 깊어지는 것은 망명자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추억’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정신의 행복한 유년 시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의 체코 침공 이후 프랑스와 덴마크로 망명했던 이레나와 조제프는 어느 날 프라하발 비행기 속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지금 도망치듯 떠나왔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국을 떠나왔던 20년 전에는 이들이 연인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레나는 조제프를 기억하지만, 조제프는 이레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프라하에 도착한 직후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진다.

쿤데라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들은 똑같은 추억을 갖고 있지 않다. 두 사람 모두 과거로부터 두세개의 사소한 상황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제각기 다르다. 그들의 추억은 서로 비슷하지 않다. 양적으로도 그것은 비교될 수 없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많이 기억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의 현상학’은 두 사람의 관계망을 넘어,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관계들 속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고국을 떠나 있었던 20년 동안 추억은 완전히 말소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 망명자들에게 고향은 지독한 ‘단절감’만을 선사한다. 이레나가 “나는 사람들이 이십년간의 내 삶을 잘라내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단절감의 표현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여전히 망명객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여기까지만 해도, 이 두 망명객이 찾아온 고국에서의 삶은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인데, 쿤데라는 더 나아가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까지 절망하게 만드는 사건을 소설의 마지막에 배치하고 있다. 출국 전날밤, 이레나와 조제프는 하루를 함께 보낸다. 이들은 고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충만한 대화를 하고, 감미로운 정사를 나누었다는 느낌에 빠져든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제프가 자신의 옛사랑인 이레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을 유쾌하게 충전시켰던 정신과 육체의 대화라는 것 역시 실제로는 지극한 단절감의 표현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명되는 장면이다. 충격에 빠진 이레나가 조제프에게 울먹이며 묻는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지? 나는 누구지?”

이상의 대략적인 검토를 종합해볼 때, 쿤데라는 아마도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언을 들려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도 ‘망명자’로서의 인간조건을 치유할 수는 없으며, 우리는 결국 자기 관념의 미망 속에서만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복원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고향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모두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이레나가 울먹이면서 조제프에게 항의하는 말은, 결국 쿤데라가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 모두에게 묻고 싶은 말인 셈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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