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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바바리맨, 판타지를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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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9-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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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남자들의 무장복 ‘트렌치코트’가 섹시한 여성복 아이템이 될 때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지난 여름의 기막힌 폭염 때문인지 요즘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 도시가 몸서리치게 좋아지고 있다. 해질 무렵이면 괜히 기분이 고조되어 있지도 않은 비서를 불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보게. 내 바바리코트를 가져오게.” 이 대사는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드레서였으며 심슨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영국의 왕위 자리를 버린 세기의 로맨티스트였던 윈저공(에드워드 8세)이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즐겨한 말인데, 나처럼 상상력이 없는 자들이 트렌치코트 얘기를 할 때마다 매번 즐겨 사용하고 있다.


가을이면 거의 모든 패션지들이 트렌치코트에 대해서 다룬다.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의 참호 안에서 태어난 가장 실용적인 아이템이 바람 불고 안개 끼는 현대 도시로 넘어와 성별을 초월하고 가장 도시적인 멋을 반영하는 스테디 아이템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군이 입었던 오리지널 방수용 개버딘코트가 요즘은 마치 란제리처럼 몸에 척 휘감겨오는 부드러운 새틴 소재의 트렌드 아이템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올해는 아예 봄과 여름에도 트렌치코트가 유행하더니 가을을 만나 더욱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트렌치코트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 남성들의 영역에서는 가장 자기 방어적인 이 옷이 여성복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굉장히 섹시한 아이템으로 쉽게 전환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트렌치코트 하면 배우로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나 <형사 콜롬보>의 피터 포크 같은 배우를, 예술 장르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필름 누아르 영화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떠올리고, 직업군으로는 기자나 사립 탐정의 전유물처럼 여기는데, 그건 트렌치코트가 자기 방어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트렌치코트를 즐겨 입고 사회부 기자 생활을 오랫동안 한 어떤 선배에게 물으니 그걸 입으면 일단 상대방에게 위압적인 이미지를 주기 때문에 좋고 그 다음은 주머니가 많고 커서 취재 수첩 넣고 다니기가 아주 좋단다. 게다가 날씨가 궂은 날 단추를 채우고 벨트를 조인 뒤 깃을 세우면 왠지 무장한 느낌이라나?

반면 여성복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트렌치코트의 기능성 위에 관능미가 덧칠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잉그리드 버그먼 같은 1950년대 여배우들은 넉넉해 보이는 트렌치코트를 끈으로 질끈 묶어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거나 스커트에 구두를 신고 맨다리를 드러내 여성스러운 관능미를 묘하게 배가했다. 물론 요즘 젊은 여자들은 그러한 모래시계형 스타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폭이 좁고 실루엣이 슬림한 70년대 스타일의 트렌치코트를 단추를 끌러 오픈해서 입거나 아예 끈을 뒤로 묶어서 캐주얼하게 입는다.

하지만 좀처럼 진화할 줄 모르는 남자들에게는 여전히 트렌치코트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판타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듯 보인다. 색을 밝히는 남자들 중에 간혹 예전에 자기가 만나던 간호사 여자친구가 트렌치코트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식의 얘기를 즐겨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건 실제로 사실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판타지라도 없으면 스스로 코트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자, 일명 ‘바바리 맨’이 되어 여학교 주변을 배회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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