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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작은 영화들, 골라먹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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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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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블록버스터 없는 겨울 극장가… 스릴러, 코메디, 멜로 등 다양한 성찬

(사진/<언브레이커블>(맨위).<불후의 명작>.)

올 겨울 영화 한편 보자고 무작정 가까운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꽤나 긴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신문마다 한면을 통째로 기꺼이 할애하는 대작영화, 한번 봐두면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기 편해지는 블록버스터가 없기 때문이다.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언브레이커블>, 짐 캐리의 <그린치> 등 대작이라고 할 만한 영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래디에이터>, <미션 임파서블2>로 극장 간판을 도배했던 올 여름에 비하면 확실히 약하다. 올 들어 대작영화의 이어달리기가 이어졌던 충무로 역시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활극 <무사>가 개봉하는 내년 봄까지는 비교적 ‘작은’ 영화들이 아기자기하게 경쟁을 벌일 참이다. 특히 한국영화의 경우 멜로의 시대가 다시 왔는가 싶을 만큼 다양한 색깔의 멜로영화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또다른 특징은 영국의 클레이메이션 <치킨 런>,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이 개봉하면서 디즈니 일색이던 가족용 애니메이션이 한층 풍요로워졌다는 점이다. 블록버스터가 없다는 건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식은 없지만 풍부해진 메뉴판. 짧은 시식으로 고민의 시간을 줄여보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언브레이커블>… 마지막 반전을 또?

올 겨울 기대되는 작품 가운데 단연 두드러지는 영화는 <식스 센스>의 감독 M. 나이트 샤말란의 신작 <언브레이커블>이다. 뉴욕에서 처음 열린 시사회에서 감독이 기자들에게 마지막 장면의 보안을 신신당부했을 만큼 반전의 묘미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전작과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다. 또한 브루스 윌리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인간의 감각과 예지를 뛰어넘는, 불가해한 힘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식스 센스>의 연장선상에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데이비드 던(브루스 윌리스)은 131명이 사망한 기차탈선 사고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더구나 찰과상이나 타박상 하나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이상하게 여기는 데이비드에게 나타난 엘리야(새뮤얼 잭슨)는 데이비드가 초능력을 가진 인간임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데이비드는 그의 암시를 거부하지만 비현실적인 사건들에 계속 휘말리면서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관객과 수수께끼를 풀어가듯 시종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언브레이커블>은 <식스 센스>에 비해 액션 등의 볼거리가 늘어났다. 또한 만화 갤러리를 운영하는 엘리야는 싸구려 만화를 통해 선과 악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 부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던 <식스 센스>에 비해 매끄럽지 못하고 밋밋한 아쉬움이 있다.

(사진/<그린치>.)
짐 캐리가 주연한 <그린치>는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선물용 가족영화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선물과 동화처럼 예쁜 건물과 자동차들, 울긋불긋 빛나는 트리 조명 등 그림만으로도 솜사탕처럼 달콤한 영화다. 크리스마스를 증오하는 괴물 주인공과 환상적인 배경 등이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과 비슷하지만 색은 더 현란하고 인물들은 시종일관 소리를 지른다는 점에서 아이들이 더욱 좋아할 영화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축제를 앞두고 들떠 있는 후빌 마을. 모든 사람이 선물을 사고 트리를 만드느라 정신없지만 단 한 사람(괴물?) 그린치는 이런 분위기를 못마땅해 한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때 주위 친구들로부터 상처받고 마을을 떠나 산 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그린치는 마을의 축제분위기를 망치기 위해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린치>는 11월 중순 개봉한 미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며 완구점을 그린치 인형으로 도배하고 있다. 올 크리스마스 부모들은 그린치 인형을 사기 위해 <솔드 아웃> 2000년 버전을 찍어야 할지 모른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짐 캐리는 가면에 가까운 분장으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혀 얼굴을 확인할 수 없지만 자유자재로 돌아가는 입, 컴퓨터그래픽보다 더 과장된 몸짓 등에서 충분히 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재능을 발휘한다.

<웰컴 미스터…>… 끊이지 않는 웃음

(사진/<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일본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코미디로 최근 연이어 개봉한 일본영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일본의 한 라디오 방송 스튜디오. 극본공모에 당선된 신인 주부 작가의 애정 드라마를 생방송하는 가운데 황당한 에피소드들이 화약고처럼 줄지어 터진다. 문제의 발단은 여자 성우의 스트라이크. 왕년의 스타 노리코는 갑자기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바꿔주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의 요구에 따라 여주인공이 메어리 제인이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바뀌면서 배경은 일본의 파친코에서 미국 뉴욕의 법정으로 옮겨가고 남자 주인공의 직업은 어부에서 파일럿으로 바뀌는 등 방송중에 드라마는 걷잡을 수 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소박한 멜로드라마는 법정물로, 재난액션물로 바뀌면서 우주선과 댐붕괴까지 등장하게 된 드라마의 효과음을 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스튜디오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특히 극중 여주인공이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이름을 묻자 남자 성우가 순간 눈에 띈 맥도널드 햄버거 포장용지를 보고 즉흥적으로 ‘도나르도 마꾸도나르도’(도널드 맥도널드)라고 말하는 장면은 압권. 문제가 터질 때마다 과장되게 울려나오는 음향효과도 웃음을 배가시킨다. 뜻하지 않는 곳에서 수시로 사고가 터지는 생방송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우리의 삶에 관한 경쾌한 은유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해피엔딩과 억지스러운 교훈이 좀 거슬리기도 하지만 두 시간 동안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 신선한 웃음만으로도 충분히 그 값을 하는 영화다.

(사진/<순애보>.)
앞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올 겨울 한국영화는 멜로드라마의 성찬이다. 멜로의 고전적 소재인 시한부 인생의 최루성 멜로에서 <러브레터>식의 상큼한 신세대 로맨스까지 향기도 다양하다. 멜로 퍼레이드의 첫 테이프를 끊는 작품은 <정사>를 만들었던 이재용 감독의 <순애보>. 한·일 합작 작품으로 배우뿐 아니라 스탭도 반반씩 나누어 진행했다. 설정 자체가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의 만남이라는 지극히 ‘한·일 합작적’ 내용이다. <정사>의 주인공이었던 이정재는 이번 드라마에서도 같은 이름인 우인을 연기한다. 그러나 <정사>의 우인과 <순애보>의 우인은 하늘과 땅 차이. <정사>의 우인은 모든 여성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세련된 여피 이미지인 반면 <순애보>의 우인은 소개자리에서 만났다면 당장 의자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무기력하고 멍청한 인물이다. 무료 포르노사이트를 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는 우인은 자신을 퇴짜놓은 여인과 비슷한 외모의 여성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한국의 한 남성이 자신을 보고 사랑에 빠진지 전혀 모르는 아야(다치바나 마사토)는 날짜변경선에서 숨을 멈추고 자살하는 것이 꿈인 일본 소녀. 그는 날짜경계선으로 갈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 인터넷 성인 사이트의 사진을 찍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아야의 닉네임은 ‘루비 구두를 신은 아사코’. 교과서에도 실린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이름을 빌려와 영화는 ‘인연’에 관해 이야기한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박중훈과 송윤아가 커플이 된 <불후의 명작>은 박중훈표 코미디에 빛바랜 종이냄새나는 정물화적 로맨스를 결합했다는 점에서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인기(박중훈)는 ‘불후의 명작’을 찍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감독 지망생이지만 당장의 빚에 쫓겨다니며 에로비디오 촬영현장을 전전한다. 인기는 우연히 만난 대학선배로부터 소개받은 시나리오 작가 여경(송윤아)을 만나는 순간 ‘동공이 확대되고 입은 반쯤 벌어지며, 안면근육이 떨리는’ 경험을 한다. 둘은 의기투합하지만 늘 그래왔듯 인기의 감독인생은 꼬이기만 한다. 빨갛고 파란 줄무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판, 천막 안의 요란하면서도 쓸쓸한 서커스, 함중아의 비음이 70년대를 다시 불러오는 <내게도 사랑이> 등 영화의 디테일들은 빛바랜 사진첩의 잊혀진 기억들을 조심스레 꺼낸다.

한국 멜로영화의 다양한 색깔

(사진/<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맨위).<하루>.)

흥행메이커가 된 전도연과 설경구가 후줄근한 노처녀, 노총각으로 나오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박광수 감독과 허진호 감독 밑에서 수업받은 박흥식 감독의 데뷔작. 학교를 다닌 23년 동안 단 한번도 지각해본 적이 없는, 그러나 “성실하다”, “진국이다”라는 말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은행원 봉수(설경구)와 보습학원 강사 원주(전도연). 봉수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원주의 마음을 우연히 알게 되고 둘 사이에서는 수수한 사랑의 온기가 퍼져나간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에서 한 남자가 나무에 올라가 외치는 대사라고.

이 밖에 고소영, 이성재 주연의 <하루>와 이정재, 이영애 주연의 <선물>이 시한부 삶이라는 고전적 소재로 관객의 눈물샘을 콕콕 찌를 준비를 하고 있다. <선물>이 아내의 사형선고라는 좀더 전형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는 반면 <하루>에서는 6년 만에 얻은 아이의 짧은 시한부 삶을 바라보는 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담고 있다. 이병헌, 이은주가 연기하는 <번지점프를 하다>는 미스터리 구조라는 특이한 구성의 멜로드라마. “다시 태어나도 너만을 사랑한다는”지극히 멜로드라마적 세계관을 말 그대로 화면에 옮긴 작품으로 1월 말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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