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히딩크 흔들기?

337
등록 : 2000-12-06 00:00 수정 :

크게 작게

한국 대표팀 송두리째 장악한 네덜란드 축구… 대수술 앞둔 외국인 집도의에 협조를

(사진/2000년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거스 히딩크감독. 사상 최대의 스태프가 히딩크 체제를 측면 지원할 예정이다)
한국 축구는 지난달 네덜란드인 거스 히딩크 감독(54)의 영입을 결정, 위기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이이제이(以夷制吏)라고 했던가. 98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에 0-5 참패를 안겨줬던 네덜란드 대표팀의 감독이 히딩크이다. 그런 그를 한국으로 ‘모셔온 것’이다. 그만큼 한국은 절박한 현실에 처해 있다는 얘기이다. 한국 축구는 올해 열린 각종 국제대회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북중미골드컵, 시드니올림픽, 아시안컵 등에서 모두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계속된 부진은 허정무 감독에게 퇴진의 불명예를 안겨줬다. 결국 한국 축구의 발전과 1년 6개월 앞으로 다가온 2002한일월드컵을 위해 외국인 감독의 영입으로 결론이 정해졌다.

전폭적 지원 약속에도 끊이지 않는 잡음들

히딩크 감독은 계약만 남겨둔 상태다. 새로운 외국인 감독을 영입했으니, 그를 통해 선진 축구를 받아들여 한국 축구의 토대를 살찌우고 2002한일월드컵에서 소기의 성과(16강 진출)를 거두는 과제만이 남았다. 축구협회는 이용수 위원장에게 그랬듯, 신임감독에게도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히딩크 체제는 사상 최대의 지원 스태프가 동원될 것으로 예상된다. 코칭 스태프부터 최다 인원. 코치만 5명이다. 여기에는 네덜란드인 수석코치와 피지컬 코치가 포함된다. 한국인 코치는 11월14일 1차 기술위원회에서 박항서·정해성 코치, 김현태 GK코치 등으로 구성을 마쳤다. 또 히딩크 감독의 요구에 따라 허정무 전 감독을 기술자문 또는 고문으로 영입할 가능성이 있고 팀닥터도 상시체제로 두게 된다. 언론을 담당하는 프레스 오피서, 장비담당관이 신설되고 당연히 통역도 별도로 두게 된다. 허 감독 체제보다 지원스태프가 10여명은 더 늘어나게 된다.


이제 목표를 향해 박차를 가하는 일만 남은 듯하다. 그렇다면 푸른 빛만이 앞길에 드리워져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출발도 하기 전에 벌써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 제기를 하는 축구인들의 의견은 대략 이렇다.

첫째, 외국인 감독에게 대권을 맡기기에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 감독을 영입해 새판을 짜기에는 2002한일월드컵까지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주장이다. 한국 축구를 전혀 모르는 이방인이 한국을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겨울 휴식기를 지나면 선수를 파악하는 데만도 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그래서 기초공사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설명이다.

둘째, 코칭 스태프 구성에 대한 잡음이다. 특히 기술위원회에서 먼저 선정한 박항서, 정해성, 김현태 코치 선임의 부당성이다. 감독이 아직 계약을 마치지도 않았고 현황을 파악해 자신의 그림에 맞는 코치를 선택할 기회도 없이 협회와 기술위원회 마음대로 한국 코치를 구성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또 코치끼리 관계가 좋지 않다느니, 기술위원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선임됐다는 말들도 한다.

셋째,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면서 쓰게 될 비용에 대한 ‘딴죽’이다. 협회는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는 데 100만달러를 훨씬 넘는 돈을 쓰게 된다. 히딩크 감독의 연봉과 계약금, 또는 성과급으로 100만달러 이상의 비용이 예상되고 그 밖에 히딩크가 데려오게 되는 코치들의 연봉, 또 부대비용 이를 테면 주택, 자가용, 통역 비용 등이 추가로 들게 된다. 축구인들은 이 돈을 외국인을 위해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축구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근본적인 곳에 사용하는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이런 지적들은 ‘왜 굳이 외국인 감독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그나마 역대 월드컵 출전에서 최고 성적을 거둔 김호 수원삼성감독은 하마평에서조차 제외되는 축구계의 반목이 존재한다. 이런 지적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핵심을 찌르고 있기도 하다. 협회는 열린 마음으로 이런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국적 풍토를 못견딘 외국인 사령탑들

(사진/일본과 경기를 하는 한국대표팀 선수들)
그러나 이런 비판이나 이른바 ‘흔들기’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과거에 이미 경험이 있다. 그리고 흔들기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결과적으로 해(害)가 됐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한국 축구에 박수와 격려를 던져야 하지 않을까.

한국 축구에서 외국인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적은, 이번 히딩크 감독 이전에 이미 두 차례가 더 있었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대표팀을 이끌었던 독일의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과 96애틀랜타올림픽을 지휘했던 옛소련의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다. 크라머 감독은 지(智)와 덕(德)을 갖춘 명장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 68멕시코올림픽에서 일본의 용병감독으로 동메달 신화를 일궈냈고 한국에서도 91년 올림픽대표팀의 총감독을 맡아 28년 만에 올림픽본선 자력진출의 쾌거를 이뤄냈다. 그러나 크라머 감독은 정작 바르셀로나올림픽 본선무대를 밟지 못했다. ‘흔들기’에 낙마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쪽 감독이었던 김삼락 감독과의 부조화가 가장 큰 이유였다. 결국 김 감독-김호곤 코치 체제로 본선을 치렀고 결과는 3무로 예선 탈락이었다.

또 88서울올림픽에서 소련에 금메달을 안겼던 비쇼베츠 감독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쇼베츠 감독의 유별나고 까다로운 성격 탓도 한몫 했지만 이때도 결국 ‘흔들기’로 무너졌다. 비쇼베츠 감독은 대표팀 기술고문을 거쳐 94미국월드컵이 끝난 뒤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95년 6월 프랑스 툴롱 국제대회에 출전했을 때 불협화음은 극에 달해 지도력의 누수현상을 보였다. 비쇼베츠 체제는 코치를 교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김학범 코치와 함께 본선을 마쳤다. 1승1무1패로 예선 탈락. 그의 운명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보따리를 챙겨야 했다.

성격이 별나고 동구권 특유의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한 비쇼베츠 감독이 코치, 선수들과 갈등을 빚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온화한 성품의 크라머 감독까지 한국의 독특한 정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만큼 한국 축구 풍토가 보수적이고 외국인 감독에 저항감이 많다는 것이다. 83년 출범 이래, 한국 프로축구에 외국인 감독이 불과 5명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임기를 채우고 지도력을 발휘한 경우는 부천SK의 니폼니시 감독이 유일했다. 한국 축구계가 현 시점에서 진정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물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칼을 들고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아프기도 전에 주사를 들고 설칠 필요는 없다. 건강 관리를 잘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지금은 준비를 할 때이다. 한국 축구는 위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5년 만에 다시 외국인 감독을 불렀다. 아니 모셔왔다. 겸허한 자세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말잔치보다는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시간이 없어 더욱 그렇다.

한국 이제 축구는 네덜란드 축구에 목을 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 사령탑으로 결정됐고 유소년 축구의 수장마저 네덜란드축구협회 소속의 아브라함 브람(48)을 영입했다. 네덜란드 출신 2명의 지도자에게 한국 축구의 미래를 모두 맡긴 셈이다. 네덜란드 축구가 뭐기에.

네덜란드는 세계 축구의 강자다. 74서독, 78아르헨티나월드컵에서 연거푸 준우승하며 요한 크루이프를 앞세운 이른바 ‘토털사커’로 위력을 떨쳤다. 98프랑스월드컵과 유로2000에서도 4강에 진출했다. ‘토털사커’의 원조 네덜란드 축구는 한국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전방위 공격과 수비의 영역을 무너뜨리는 토털사커는 ‘많이 뛰는’ 한국 축구에 순기능적이다. 또 80년대 PSV 아인트호벤에서 네덜란드 축구를 익혔던 허정무 감독이 이미 일부를 접목시켜 놓았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지금은 협조와 도움으로 축구를 살려야

(사진/히딩크감독은 네덜란드의 토털사커를 한국에 이식하기 위해 대표팀을 대수술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의 새 체제로 바뀌면, 일단 한국대표팀은 대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 대표선수들의 얼굴이 바뀔 것이고 전술시스템도 전과는 달라진다. 한국 선수들은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특히 수비력이 약한 한국으로서는 한 차례 진통이 따른다. 브람 감독이 맡게 되는 유소년 축구는 더 심할 것이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담는 일을 포기할 것인가. 네덜란드 감독의 독단과 아집이 있다면 막아야 한다. 그러나 우선 협조와 도움이 선행돼야 한다. 네덜란드인의 손에 내맡겨진 한국 축구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박정욱/ 스포츠서울 축구팀 기자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