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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태원,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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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8-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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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이 만난 세상]

▣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오늘 이태원 가서 놀자!”

몇주간 불안함과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난 결국 친구에게 이 말을 꺼냈다. 이미 클럽에 관한 글을 두번이나 썼던 것을 변명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춤을 추기 위해 클럽에 갔던 적은 단 4번이다. 내추럴 본 막춤에다 부실한 몸에 그다지 잘나지 않은 얼굴을 가진 난 본디 클럽에서 춤추기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게다가 먹고살 걱정도 태산인데 적잖은 입장료를 내고 클럽에 가는 것은 여간 부담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난 춤이라도 추지 않으면 추스를 수 없는 권태로움과 점점 망가져가는 삶 속에 찌든 찌꺼기를 털어내듯 몸이라도 마구 흔들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타향살이에 지친 나와 같은 이방인들의 공간 이태원이다. 난 이태원에 가기 위한 예의마냥 꽃단장을 했다. 몸이 드러나는 예쁜 민소매티와 모던한 캐주얼 바지 그리고 천박한 비주가 달린 팔찌를 차려입고 이태원으로 출발!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용산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미군들, 헐렁한 힙합 차림의 흑인과 세련된 치장을 한 백인 여성들이 활보하는 이태원은 한국의 어느 곳보다 이국적인 인상을 지녔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 잡은 세련된 게이바는 토요일 저녁이면 서울 전역의 게이들이 모여들어 발 디딜 곳 없이 부산한 이태원의 풍경을 완성한다. 게이바가 열리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맥주로 목을 축이려 바에 들어갔더니 온통 육체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성들이 홀로 앉아 낯선 시선으로 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나와 친구를 바라본다. 잠시 주위를 살피다 그곳이 성매매 알선 주점임을 깨닫곤 깜짝 놀라 나왔다. 그리고 어딜 갈까 이태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는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굵은 턱선을 가리려는 듯 짙은 화장과 섹슈얼한 드레스를 입은 그 트랜스젠더의 눈빛에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것이 나의 쓸쓸함에 의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세상이 나눈 어떠한 경계에 속하지 못한 채 이태원 거리에 주저앉은 그녀의 모습이 슬퍼 보였다.

우리는 백인 게이들이 주소비층인 호모힐의 ‘윗동네’에 있는 한 바에 들어가 쇼를 위해 드랙 분장을 한 마담과 함께 너스레를 떨며 놀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문을 연 게이바로 갔다. 이곳은 이성애자로 가장한 낮의 생활로부터 하룻밤의 일탈을 감행한 게이들이 관능적인 동작으로 골반을 돌리며 춤을 추다가도 꽃단장을 하고 온 자신의 몸이 관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관음의 주체가 되기도 하는 몸의 전시장이다. 그렇게 몸을 뒤섞어 한참을 놀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동이 트기 시작했다. 피곤에 찌든 상태로 집에 가려는 우리를 붙잡는 이태원의 또 다른 이방인은 제3세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그 이른 시간에 “함께 밥이나 먹자”는, 필시 나와 하룻밤을 동행한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자)친구를 꼬시기 위한 제스처임에도 불구하고, 타지에서 인종차별을 겪으며 저임금 노동을 하는 위치를 생각하니 거절하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태원은 한국 주류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소수 종족(성매매 여성, 게이, 트랜스젠더,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이방인의 공간이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떠도는 이방인들의 공간, 그곳이 바로 이태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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