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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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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8-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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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간첩의 추억(2)- 1971년 이후 오리지널 남파 간첩보다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급격히 늘어난 사연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1970년 11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는 북의 대남사업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1968년 11월 울진, 삼척 등 후방 산악지대에 농촌혁명 근거지를 만들겠다며 120명이라는 대규모 무장 공작원을 침투시켰다가 실패를 맛본 북은 나름대로 ‘남조선 혁명’의 성격과 주체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1968년 대공세의 참담한 실패의 교훈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체계화되기 시작하는 주체사상의 영향으로 북은 남조선 혁명은 “어디까지나 남조선 인민들 자체가 주동이 되어 수행해야” 하며, 북이 이를 지원할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게 된다. 이런 입장 정리가 이루어지면서, 1971년부터는 남파 간첩의 수가 뚝 떨어지게 된다. 한옥신의 <사상범죄론>에 의하면 1951년부터 1967년까지 자수·체포·사살된 간첩의 수는 1429명으로 연평균 80명을 넘었다. 대공기관도 바쁠 수밖에 없었다.


1971년 4월 대선 직전에 터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주인공 서승(오른쪽), 서준식 형제. 보안사령부는 자체 발간한 <대공 30년사>에서 이 사건을 두고 “대공 활동 사상 획기적인 금자탑”으로 평가했다.

간첩이 와도 걱정, 안 오면 더 걱정

그런데 이제 간첩이 더 이상 남파되지 않게 된 것이다(물론 휴전선 일대의 정찰임무를 맡은 고전적 의미의 간첩은 계속 파견됐을 것이다). 간첩이 와도 걱정이지만, 안 오면 더 걱정인 사람들도 있었다. 스웨덴 영화 <깝스>는 그래도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단 한건도 범죄가 없었던 평화로운 마을에 경찰서를 없애려 했기에 관객들이 코미디로 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의 간첩 사냥꾼들은 10년은커녕 단 1년도 제대로 기다리지 않았다. 북에서 간첩을 내려보내지 않으면 남에서 만들어냈다. 이 점은 1989년 12월 당시 복역 중인 장기수들의 사건을 유형별, 연도별로 분류해보면 뚜렷이 나타난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재일동포 간첩, 납북어부, 유학생 간첩, 일본 관련 사건 등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간첩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 현재 장기수 216명 중 순도 높은 오리지널 간첩인 남파공작원은 3분의 1도 안 되는 61명에 지나지 않았다.

간첩은 시도 때도 없이 내려왔는지 모르지만, ‘간첩 사건’은 아무 때나 터지지 않는다. 수사 기한이 사실상 무한정인 간첩 사건의 경우, 공안기관은 택일을 해서 효과 만점일 때를 기다려 사건을 터뜨린다. 매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꼭 간첩 사건이 떼로 일어났고, 민주화운동이 치열해지거나 군사독재 정권이 곤경에 처해도 어딘가 숨어 있던 간첩은 어김없이 나타나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간첩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간에 치열한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의 유세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날로부터 꼭 이틀 뒤인 1971년 4월20일, 보안사령부는 서승·서준식 등 학원침투 재일동포 형제간첩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보안사령부는 자체 발간한 <대공 30년사>에서 이 사건을 두고 “대공 활동 사상 획기적인 금자탑”으로 “우리 대공팀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국 대공 활동사에서 찬연히 빛날 공적으로서 사건의 규모 면에서나 우리 대공팀의 활동 면에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대사건”으로 자화자찬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북괴가 학생들을 선동하여 학원 데모를 가열화하여 사회 혼란을 획책하고 있었음을 실증”했다는 것이다. 1971년 4월이라면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예비군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어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고, 대학가에서는 교련반대 데모가 한창이었다. 서준식이 뒤에 옥중에서 어느 대학생을 만났을 때 그는 “당신들 때문에 교련 반대가 깨져버렸소. 우리가 쫓겨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오?”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쯤 되면 조작간첩 사건에 익숙해져 민주화운동 진영이나 사회 일반에서도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겼지만,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간첩 사건의 효과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공안당국의 간첩 만들기가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보안사는 서승이 북의 지령을 받아 대학생들에게 교련 반대투쟁과 반정부 투쟁을 선동했다는 것과 김대중 후보쪽에 북에서 받은 불순한 자금을 전달하려 했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그를 고문했다.

“재일동포 대다수가 북 지지”의 비밀

서승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야당 후보가 용공의 낙인을 쓰게 되고, 학생운동에 붉은 색이 칠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무지막지한 고문에 쓰러져 나뒹굴면서 이 고문을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잠시 기적처럼 취조관도 경비병도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 사이, 서승은 경유 난로의 연료통을 집어들어 마개를 열고 기름을 머리에 붓고는 불을 붙였다. 석유나 휘발유였다면 그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천천히 타들어가는 불길 속에서 그는 “죽어야 한다는 의지와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며 데굴데굴 굴렀다”고 한다. 서승은 온몸을 내던져 자신이 주범이 된 간첩단 사건이 더 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간첩 사냥꾼들이 다른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사냥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도쿄에 있는 총련 중앙본부 건물. 1970년대에 총련과 민단계 그 어느 쪽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던 재일동포를 간첩으로 만드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사진/ 박승화 기자)
그런데 왜 당시 대공기관 사람들은 하필이면 고국을 그리워하며 모국어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흉악한 간첩으로 만들었을까? 사실 간첩을 만들라치면 재일동포보다 손쉬운 먹이는 없었다. 이념적으로 자유로운 일본 사회에서 교육을 받았고, 총련(조총련)계와 민단계가 한 가족 속에 있을 정도로 스스럼없이 섞여 살고 있는 동포 사회의 특성상 나쁜 마음을 먹고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같은 자의적인 법을 국내에 들어온 재일동포들에게 들이민다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재일동포가, 또는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이 간첩 혐의를 받게 되는 전형적인 계기란 일본에서 총련계 인사들을 만나 북의 영화나 서적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데, 이는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재일동포는 원래 97%가 남한 출신이다. 그러니 원래 출신 고향대로 한다면 분단된 조국의 북쪽보다는 남쪽을 택하는 사람이 많아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남쪽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재일동포를 버리는 기민정책(棄民政策)을 일삼았다. 반면 북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차별받는 재일동포 사회의 민족교육에 일찍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많은 동포들이 북을 지지하여 1960년대까지는 총련의 세가 민단을 압도했으며, 고향이 남쪽인 재일동포 10만여명이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건너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쪽의 공안기관은 재일동포라면 모두 북과 연결된 불순한 세력으로 보게 된 것이다. 또 국내의 학생이나 반정부 세력의 경우 기껏해야 고무찬양죄나 이적표현물 소지죄 정도밖에는 걸기 힘든데, 반국가단체 성원이 우글거리는 일본에서 살다 온 사람이야 얼마든지 간첩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수사기관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었다.

증거? 증인? 그런 건 간첩을 만드는 데에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 ‘Made in North Korea’의 원단 간첩이 오지 않게 되어 일본산 원료를 들여와 한국에서 가공해 짝퉁 간첩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초창기인 1971년에 한 공안검사는 재일동포 관련 사건이란 “거의 대부분이 물적 증거는 없고 또 인적 증거도 거의 없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결국 피고인의 자백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니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잡아다가 일단 고문을 시작하는데, 간첩이라 자백하면 당연히 간첩이 되는 것이고, 간첩이라 자백하지 않고 버티면 고문에 저항하는 훈련이 잘된 거물급 간첩이 된다. 수사기관에 간첩으로 찍히면 빠져나올 길이 없는 것이다. 어느 재일동포 ‘간첩’은 “잠깐 갑시다”란 말에 끌려가 정신없이 맞는 동안 자백을 하지 않자 취조관이 “신사적으로 하니까 안 되겠구만” 하며 전기고문을 시작하더란다.

만년필 한 자루와 이근안

어떤 재일동포가 총련의 하급 간부로 있는 다른 동포와 만나 공화국(북)에는 세금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김일성의 항일무장 투쟁에 공감을 표시했다면 우선 고무찬양과 반국가단체에 대한 동조는 기본으로 깔게 된다. 한국에 친척 방문이나 유학가게 되었다고 말하면, 한국에 갈 수 없는 총련 동포는 부러운 눈으로 기회가 되면 자기 고향도 한번 방문해 어떻게 변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겠다고 하면 ‘지령 수수’가 추가된다. 이제 한국에 가면 ‘잠입’이요, 친척 방문과 관광을 다니다 그 총련 동포 고향 근처에라도 들러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면 그게 ‘탐문수집’이요, 별 탈 없이 일본에 돌아오면 성공적인 ‘탈출’이다. 총련 간부 만나 고향 소식 전해주면 회합, 보고, 통신연락은 또 기본이다. 이 정도면 간첩죄 풀코스가 성립되는 것으로 최소 7년은 기본이다. 이런 재일동포 유학생을 알게 되어 그에게 밥을 사주면 편의 제공이나 간첩 방조가 되고, 밥을 얻어먹으면 포섭이 되어 간첩단에 이름이 오를 수도 있다. 당시 서울의대에 재학 중이던 내 큰형의 친구도 동급생인 재일동포 강종헌에게 몸조심하라는 말을 했다가 도주 방조로 징역을 살고는 이민을 떠났다.

어떤 ‘간첩’은 물증이라고는 여권과 학생증이고, 또 다른 재일동포 ‘간첩’ 강희철 사건에서는 일제 만년필이 물증이었다. 그 만년필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지도원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만년필이 무슨 살인사건에 사용된 흉기도 아닌데, 작성했다는 보고서도 없는 상황에 만년필이 증거가 되었다. 이래도 “무기 또는 사형, 혹은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간첩죄가 성립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유신정권하의 한국의 사법부는 국가보안법 사건, 특히 간첩 사건에 관한 한 그렇게 길들여져갔다.

옛날 진나라 조정에서 실권자인 환관 조고(趙高)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자 모두 따라서 말이라 했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가 있다. 일본말 바가야로(馬鹿)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재일동포 유학생 김병진은 자신이 보안사에 의해 간첩으로 만들어졌다가, 강제로 보안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른 재일동포를 간첩으로 만들어야 하는 기막힌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의 생생한 회고록 <보안사>에서 어느 고참 준위의 명언을 전하고 있다. “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인 것이야.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인 것이지.” 대법관을 지낸 박우동은 자신의 회고록 <판사실에서 법정까지>(1995)에서 “두고두고 꺼림칙해서 잘 잊혀지지 않는다”는 간첩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박우동 대법관이 말한 꺼림칙한 간첩 사건이란 바로 만년필 한 자루가 물증인 강희철 사건이고, 이 사건을 수사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이근안이었다. 그러나 어디 강희철 사건뿐이었으랴….

한민통 사건, DJ 제거의 '흉기'를 얻다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도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한 고비 어려움을 헤쳐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국내 또는 해외의 반독재운동의 손발을 옥죄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인 그림을 그려나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7년 학원침투 재일동포 간첩 김정사(金整司) 일당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엉뚱하게 김정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반국가단체로 낙인찍는 계기가 되었다. 김정사는 한민통 회원도 아니고, 단지 한민통 강연회에 한두번 참가했을 뿐이라 한다. 보안사가 발간한 <대공 30년사>에도 이 사건은 김정사의 상급 지도원이 한국청년동맹(한청) 소속인데 한청은 단순한 반한단체일 뿐 반국가단체가 아니라서 “구속영장 신청시에 고충이 많았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김정사가 청취한 “북괴방송 내용 및 녹음테이프” 등을 첨부해서 간신히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송치하게 되었고, 송치 뒤에 “한청이 북괴 지령 하에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란 증거 수사를 끈질기게 행하여” 결국 한청의 상급단체인 “한민통은 반국가단체로 규정지은 관례를 남김으로써 앞으로는 한민통에서 공공연하게 침투활동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색출 처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보안사는 흡족해했다.

당시 유신정권이 한민통과 아무런 상관없는 김정사를 간첩으로 만들어 한민통에 반국가단체란 ‘훈장’을 달아준 것은 직접적으로는 1977년 한민통이 전세계의 반유신운동을 하나의 대오로 결집한 민족민주통일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을 결성하는 데에서 핵심 역할을 한 때문이다.(한민통에 대해서는 387호 본란 참조) 그러나 일단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낙인찍자 공안당국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편리해졌다. 유신정권으로서는 눈엣가시였던 김대중을 영원히 제거할 흉기를 얻었다. 1980년 전두환 일당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뒤 김대중을 얽어맬 때도 사형 판결은 내란음모 때문이 아니라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의장이기 때문에 선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민통이 반국가단체가 됨에 따라 재일동포나 일본을 왕래하는 인사들의 간첩 만들기는 훨씬 쉬워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이 아니라 한국 국적을 가진 한민통 사람들만 만나도 지도원을 만나 지령을 수수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가 되는 데에는 거물 자수 간첩이라고 소개된 윤효동(尹孝同)의 증언과 주일 한국대사관의 영사증명이 결정적이었다. 민단 지방간부 출신인 윤효동은 자신이 1970년 4월 한민통의 핵심간부인 곽동의를 대동하고 북에 가서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이 당시 곽동의가 일본에 있었다는 증거는 그의 발언이 수록된 민단 작성의 회의록을 비롯하여 아주 많다. 그가 진짜 북한 공작원인지의 신원은 영사증명으로 대신하는데, 영사증명의 내용은 윤효동의 일방적인 진술을 담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이런 영사증명에서 한번 북의 공작원으로 몰리면 대책이 없다. 법정에 와서 무고하다고 증언할 수도 없고 귀국은 불가능해져 꼼짝없이 국제미아가 되고 만다. 출판인 장의균에게 총련쪽 사람 만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양관수는 북의 공작원 감투를 쓰고 십수년간 귀국을 할 수 없었다. 박정희 시대에 비롯된 재일동포 간첩 만들기는 전두환 시절, 특히 보안사나 안기부, 경찰 등 공안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승진과 포상금과 해외여행을 위해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죄가 무슨 죄가 있냐구!

요즈음 박정희의 친일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많다. 나는 박정희가 범한 친일행각이며, 좌익활동과 전향이며, 군사반란이며,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죄가 밉지 사람이 밉나 하며 좀 너그러운 척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일본놈 밑이지만 출세하고 싶고, 남로당이 정권 잡을 것 같고, 반란 음모로 걸렸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지도 팔 수 있고, 정권 잡고 싶으니 군대 동원할 수도 있고…. 다 나쁜 짓이긴 해도 유독 박정희만 이런 짓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멸시와 차별 속에 살다가 민족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국에 온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장학금을 주며 따뜻한 격려는 못할망정 거꾸로 매달아 간첩으로 만든 소행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자꾸 <넘버3>에 나오는 조폭보다 더 조폭 같은 마동팔 검사 편에 서게 된다. 죄가 무슨 죄가 있냐구, 죄지은 놈이 정말 나쁜 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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