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울타리 안의 개성’을 쫓는 기이한 일본인과 문화 침공의 사이렌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욘사마’의 매력에 푹 빠진 일본 여성들이 한국 관광이나 한국어 레슨에 그치지 않고 ‘준상’의 춘천 집까지 몰려가서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뉴스를 듣고 내 입에서는 대번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다들 팔자 좋군. 역시 최첨단 도시에 사는 인간은 너무 심심하거나 편해지면 어떤 식으로든 퇴행을 즐기게 되는 모양이야.”
정말이지 일본 여자들만큼 집단적이며 동시에 개성적인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뭐랄까? ‘이지메’ 당하지 않기 위해 다 같이 하나에 열광하면서 그 좁아터진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돋보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 보니 이런저런 기현상이 벌어진다.
사실 나로서는 일본 여성 하면 두 가지 영상이 떠오른다. 하나는 기모노를 입고 전통 ‘료칸’의 다다미방 앞에서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종업원들이다. 하얀 목덜미만 드러낸 채 무슨 일에든 복종할 것처럼 앉아 있는 그들만큼 사무라이 같은 마초들에게 관능적인 성적 판타지는 없다.
한편으로는 2000년대 초반 세계 패션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코가루족’이라는 동경의 10대 소녀들이 연출한 기현상이 떠오른다. ‘참사’를 일으킬 만큼 높은 플랫폼 신발, 구워지다 못해 타버린 듯한 인공 선탠 그리고 파란색 아이새도와 노란 가발로 무장한 ‘소녀 군대’ 말이다. 그들은 시부야 같은 곳에 모여 낮에는 쇼핑을 하고 밤에는 모두가 똑같은 동작으로 ‘파라파라’라는 이상한 춤을 췄다. 그 중에는 친구들보다 루이뷔통 가방을 더 많이 갖기 위해 혹은 더 돋보이기 위해 1분 단위로 돈을 받는 폰섹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녀가 있었는가 하면, 전철에서 9cm짜리 바이브레이터를 사용하는 여자애도 있었다. 체제 저항의 의지나 메시지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또래 사이에서 눈에 띄고 싶은 단순한 욕망과 순수한 획일성만 있었을 뿐이다.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은 개성이 발달해가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일본인들은 집단의 획일성 안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극단적으로 소진하는 것으로써 개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대중문화에 병적으로 몰입하는 ‘오타쿠’나 자기 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히키고모리’ 집단이 그렇다. 요즘 도쿄에는 천사 옷을 입고 취미로 자해하는 ‘고스로리’라는 희한한 자살지망생 소녀들이 또 다른 기현상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은근슬쩍 일본을 얕보고 싶다가도 국내에 들어온 저력 있는 일본 소설이나 영화를 접하면 왠지 속았다는 기분이 든다. 지들은 ‘욘사마’ 같은 가벼운 팬시 상품에 열광하는 척하면서 우리한테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기타노 다케시 같은 거물을 보내는 거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적 영토를 조금씩 점령해나간다. 역시 무서운 사람들이다. 재미없다는 이유로 <겨울 연가>를 보지 않았던 나는 요즘 다이도 다마키가 쓴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라는 기묘한 연애소설에 푹 빠져 있다. 문체도 내용도 너무 쩨쩨해서 저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심지어 그 소설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굉장한 문체로 거대한 이야기만 써대는 국내 작가들을 미워하게 됐으니, 머릿속에서 침공이 본격화됐다는 사이렌이 울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진/ www.fashioninjap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