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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연] 뮤지컬 음악이 노래방에 뜰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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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8-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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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뮤지컬 <청년 장준하>의 음악적 가능성… 작곡가 송시현씨가 보여준 다양한 화성과 새로운 색깔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역사는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세계 4대 뮤지컬 가운데 <캐츠>(1982), <오페라의 유령>(1986) 등 2개가 그의 작품이다. 그는 20대 초반에 작가사 팀 라이스를 만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1)라는 록 뮤지컬의 대표적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가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 RUG(Really Useful Group)를 설립해 <캐츠>로 20억달러, <오페라의 유령>으로 30억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을 뮤지컬에 접목한 작곡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보이지 않는 소리(음악)는 뮤지컬의 음악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그의 소신을 존중한 제작자와 작가가 있었던 것도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나 항상 그대를> 작곡가가 판을 바꾼 이유


송시현씨는 국악을 현대화하는 김대성씨와 함께 뮤지컬 <청년 장준하>의 음악을 맡았다. (사진/ 박항구 기자)
우리에게도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나올 수 있을까. 청강문화산업대학 이유리 교수(공연산업계열)는 국내의 뮤지컬 음악에 대해 “음악적 리듬에 의해 극이 구성돼야 한다는 뮤지컬 제작의 기본마저 자리잡지 못한 상태다.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이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면서도 국내의 여건과 정서에 맞도록 음악을 재창조하는 작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그래서일까.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창작 뮤지컬 작곡가도 첫 번째의 명성을 이어가는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국적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최기섭씨, 작곡가와 작가가 3개월 동안의 협력 작업으로 완성도를 높였던 <페퍼민트>의 이두헌씨 등도 전작의 명성을 잇는 후속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창작 뮤지컬의 음악적 가능성을 다시금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저항적 지식인 장준하 선생의 삶을 무대에 옮긴 뮤지컬 <청년 장준하>(8월18~2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가 바로 그것이다. 뮤지컬 <청년 장준하>는 젊은이들의 도전과 사랑, 조국애를 표현한 감성 드라마에 6천리 대장정이라는 로드무비적 요소를 곁들여 감성로드뮤지컬을 표방한 역사물이다. 서울 시립국악관현악단, 오케스트라, 록밴드가 연주로 들려주는 국악과 발라드, 록 등을 기본으로 한 27곡은 관객에게 보고 듣는 즐거움을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 현대 국악의 희망적인 멜로디와 록과 발라드의 열정적 하모니가 뮤지컬 음악의 놀라운 변신을 예고하는 것이다.

장준하 역의 조승룡씨와 부인 역의 임유진씨가 함께 부르는 <나 여기에>는 송시현의 음악적 색깔이 그대로 담겨 있다.
뮤지컬 <청년 장준하>의 음악적 자신감은 <꿈결 같은 세상> <나 항상 그대를> 등을 작곡한 대중적 음악 코드의 소유자인 송시현(39)씨로부터 나왔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싱어송라이터로 <가야 할 나라> 〈Dear America〉 등의 금지곡을 ‘양산’하기도 했던 그는 4년 전 뮤지컬 작곡자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 부산시민회관에서 <지저스…>를 보면서 뮤지컬 작곡의 꿈을 키웠던 그가 20여년 뒤에 <알라딘의 요술램프>라는 어린이 뮤지컬로 데뷔한 것이다.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하며 ‘기본기’를 다진 그이기에 뮤지컬 음악에 ‘덤빈’ 것은 당연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뮤지컬 작곡가로서 <들풀의 노래>(2001), <매소성의 꽃송이>(2002), <터널>(2004) 등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12편의 음악을 만들었지만 색다른 양식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청년 장준하>는 그에게 전환기적 작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뮤지컬에서 음악이 전부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완전한 드라마로 인해 음악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픔을 지난 4년 동안 곰삭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뮤지컬의 멜로디가 아름답다’는 말은 새로움을 들려주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꼬리표’로 여겨졌다. 더 이상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가 변하지 않는다면 뮤지컬 작곡자로서 생명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함도 느껴졌다. 대중가수, 대중가요 작곡자, 영화음악가 등을 거쳐 뮤지컬 작곡자로 이름을 알린 그의 음악인생에서 <청년 장준하>를 만난 것은 행운에 가까웠다. 기존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깨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싱글 발매… “뮤지컬 ‘음악’으로 이해해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은 나의 전부가 아니다. 그런데도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것만을 원했다. 장준하 선생에 대한 강성 투쟁 등의 이미지를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표현하면서 새로운 색깔을 드러낼 수 있었다.” 뮤지컬 <청년 장준하>는 송시현이라는 작곡자의 진면모가 곳곳에 드러난다. 그동안 다른 작품에 적용할 수 없었던 다양한 화성적 기법도 선보였다. 노랫말을 쓰면서 갈고닦은 ‘문학성’으로 대본을 맛깔나게 걸러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뜻이 통하는 연출가 배우들을 만난 일이었다. 이렇다 보니 배우가 되어 춤을 추고 노래하며 하루에 20여 시간씩 작곡을 해도 피곤을 느낄 리 없었다,

뮤지컬 <청년 장준하>에는 아역 15명을 포함해 60여명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하는 배우들. (사진/ 박항구 기자)

아무리 뛰어난 작곡자라 해도 음악적 리듬을 추구하는 연출자와 함께 작업을 하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다. 다행히도 뮤지컬 <청년 장준하>의 작가로서 연출을 맡은 조한신씨는 대본을 달랑 넘기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대본과 음악을 연습 과정에서 ‘원본’에 손을 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든 음악이 배우를 사로잡는 것은 당연하다. 뮤지컬 <몽유도원도>에서 맡은 향실 역으로 2003년 뮤지컬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고 이번 공연에서 장준하 역을 맡은 뛰어난 가창력의 배우 조승룡씨는 그의 음악에 대해 “음악과 드라마가 동시에 사는 뮤지컬을 경험하고 있다. 그동안의 뮤지컬 작업으로 연기와 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말한다.

이제는 창작 뮤지컬 음악에도 새로운 변화의 흐름이 형성되는 것일까. 뮤지컬 <청년 장준하>는 국내 뮤지컬 사상 최초의 ‘싱글 앨범’ 발표라는 의미 있는 사건을 만들었다. 사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이 공연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음반을 발표해 홍보를 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이 역시 뮤지컬 음악의 완성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전략이었다. 그는 〈Memory〉(<캣츠>), 〈Don’t cry for me Argentina〉(<에비타>), 〈I don’t know how to love him〉(<지저스…>) 등의 뮤지컬 히트곡들로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관객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뮤지컬 삽입곡을 미리 접한 뒤 공연장에서 드라마로 확인하는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시도가 일회적 사건에 머물지 않으려면 뮤지컬의 저변 확대가 필수적이다.

“뮤지컬 음악으로도 대박을 터트리는 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머지않아 대중음악인들이 뮤지컬 무대에 활발하게 오르는 분위기가 형성되리라 본다. 무엇보다 뮤지컬을 음악적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요즘 송시현씨는 한달에 1천만원가량의 대중가요 저작권료를 챙기고 있다. 그는 뮤지컬도 물량공세 시기를 지나면 자연스럽게 질적 전환이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그때가 되면 뮤지컬 음악도 방송을 타고 노래방에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청년 장준하>의 뮤지컬 음악 대중화 시도는 그야말로 ‘선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영국의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그랬던 것처럼 작품난을 겪고 있는 브로드웨이에 우리의 창작 뮤지컬을 긴급 수혈할 여건을 조성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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