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화식열전3] 돈과 권력도 모두 얻으리라

521
등록 : 2004-08-05 00:00 수정 :

크게 작게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현대적 관점에서 본 화식열전3]

거부를 먼저 이룬 뒤 권력 추구에 성공한 여불위, 대정치가였다가 상인으로 변신한 범려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농업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은 몇배이겠는가? 아무리 많아도 10배 정도일 것이다. 보석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100배를 넘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왕을 세워서 이익을 얻는다면 과연 몇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헤아릴 수 없다. 무한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 싸움에서 패배한 조나라의 포로 수십만명이 생매장돼 떼죽음을 당한 지 1년 뒤인 기원전 259년, 조나라 수도 한단에는 앞으로 진나라의 역사를 바꿔쓸 세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상인’과 ‘왕손’과 ‘무희’….

인질로 온 ‘왕손’에 접근한 여불위

중국 고관들의 공적인 삶을 나타내는 고분벽화. 거부를 이룬 사람 가운데 일부는 권력까지 추구하곤 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가운데 주인공인 상인의 이름은 여불위(呂不韋), 한나라 양책 사람으로 사업차 조나라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돈을 번 수법은 대단히 정통적이다. <사기열전>에 따르면, “큰 상인으로 여러 곳을 오가면서 물건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되팔아 집안에 1천금의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건 지난호 ‘화식열전2’에 소개한 백규가 쓰던 상술과 그대로 닮았다.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 사들이고 사람들이 사들일 때 팔아넘겼다’는 그것이다. 한단에서 사업거리를 찾던 그에게 ‘재미있는’ 정보 하나가 들어온다. 진나라 ‘왕손’ 하나가 인질로 조나라에 와 있는데, 본국에서 돌보지 않는데다가 조-진 대전 때문에 사는 게 형편없다는 것이다.

“이 진귀한 재물은 사둘 만하다!”

이게 여불위의 첫 반응이었다. 여불위는 왕손 이인을 찾아갔다. 그는 앞으로 재산을 기울여 왕손의 가문을 크게 만들어주겠다고 설파한다. 그리곤 평생 번 재산의 절반인 500금을 왕손 이인에게 주어 빈객을 사귀는 등의 비용으로 쓰도록 하고, 자신은 나머지 재산인 500금을 들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들어간다. 여불위가 벌었다는 ‘1천금’은 일반적으로 큰 돈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 뒤 정확하게 ‘500금’으로 기록된 점에 미뤄 정확한 ‘1천금’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진나라는 소왕이 무려 50여년이나 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태자인 안국군 밑으로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도대체 차기 태자 이후의 왕권은 누구에게 갈 것인지 전혀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여불위는 가지고 간 자금을 동원해 안국군으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화양 부인과 그 언니를 설득해 이인을 화양의 양자로 삼게 한다.

“아름다운 얼굴로써 남을 섬기는 사람은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면 사랑도 시든다고 합니다. 자식이 없는 지금 효성스러운 자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귀한 자리에 있고, 남편 사후에는 양자가 왕이 되므로 끝까지 권력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 적격자가 바로 이인입니다.”

조나라에서 냉대만을 받던 ‘잊혀진 왕손’이 일약 대국 진나라의 태자 계승자로 업그레이드된다.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보고 길목을 선점한 큰 도박이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여불위는 한발 더 나아가 당시 자신이 총애하던 ‘무희’를 왕손 이인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양보한다. <사기>에 따르면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자기 집 재산을 다 기울여 이인을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은 진기한 재물을 낚으려는 것임을 떠올리고 마침내 여자를 바쳤다’는 것이다.

여불위가 식객을 모아 편찬한 <여씨춘추>(왼쪽)와 여불위의 실제 자식으로 추정되는 진시황.

무희인 조희는 당시 임신하고 있었지만, 이 사실을 속이고 이인에게 가 마침내 아들 정을 낳고 정식 부인으로 세워진다. 이 아들 정이 바로 나중에 진시황이 된다. 이런 놀라운 공로로 이인이 양부 안국군(효문왕)의 뒤를 이어 왕(장양왕)에 오르자, 여불위는 즉위한 그해에 바로 승상으로 임명되고, 장신후라는 후작까지 받는다. 그리고 하남 낙양의 10만호를 식읍으로 받는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뒤에 죽고 정이 왕에 오르자 여불위는 다시 상국으로 승진한다. 왕은 그를 ‘중부’라고까지 불렀다. 한때 여불위의 집안에 있는 하인의 수는 1만명을 헤아렸으며, 식객도 3천명에 이르렀다는 기록까지 있다. 그가 아무리 상인으로 성공해 부를 긁어모은들 과연 이런 부와 영광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범려, 오나라를 멸망시키다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이 모두 1천금의 자금과 절묘한 기획력, 정보력 등의 합작품으로 이뤄진 것이다. 당시 상인들이 비록 거금을 보유할 수는 있어도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거의 막혀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여불위의 성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자기의 실제 자식이 통일 천하의 황제가 되는 거대한 꿈마저 실현된다면? 여불위의 야심은 실로 크고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여불위가 거부를 먼저 이룬 뒤 권력까지 추구해 성공한 경우라면, 정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도 있다. 대정치가였다가 상인으로 변신한 범려가 그렇다. 범려는 월나라왕 구천의 명참모였다. 월나라가 오나라와 반세기에 걸쳐 싸울 때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범려의 공이 거의 결정적이었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한 뒤 살아남기 위해 항복교섭을 담당한 것을 비롯해 월나라의 생존책, 부국강병책, 오나라의 교란책 등이 모두 그의 지모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월나라가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범려는 “월왕(구천)은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하고 눈은 매처럼 매서우며 이리처럼 걷지 않는가. 이와 같은 인물과는 어려움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평화를 함께 즐기기는 불가능한 법이다.” “스승 계연의 7가지 계책 가운데 월나라는 5가지를 써서 뜻을 이루었다. 나라에서는 이미 써보았으니, 나는 이것을 집에서 써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표표히 사라진다. 그가 가족과 함께 월왕의 감시를 벗어나 이름마저 ‘치이자피’로 바꾼 뒤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제나라 해안 지방이다. 범려 일족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열심히 일한 결과 수십만금의 재산가가 됐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재상이 돼달라고 부탁해오자, 범려는 애써 모은 재산을 모조리 친구나 향당에 나눠주고 값나가는 보물만을 가지고 그곳을 떠난다.

전 재산을 털어 진나라 왕손에게 투자해 성공한 거상 여불위(왼쪽)과 상신의 시초로 꼽히는 범려. 범려는 월왕 구천의 패업 달성 뒤 참모의 직책에서 재빨리 도망쳐 상인으로 변신해 대성공을 거둔다.
그가 두 번째 정착한 곳은 도(陶)라는 교통 요충지이다. 오늘날 산둥성과 허난성의 경계에 가까운 정도현 근방으로 춘추시대 당시 노(魯)나라 송(宋)나라 위(衛)나라 조(曹)나라 정(鄭)나라 등 여러 나라가 서로 복잡하게 국경을 접하고 있고, 제(齊)나라 진(晋)나라 초(楚)나라 같은 대국의 전진 거점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도는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의 여러 나라와 통해 물자의 교역이 이뤄지는 곳이다.” 이렇게 판단한 그는 이 교통 요충지에서 상업을 벌였다. 농업에서 상업으로 비즈니스의 중심을 옮겨간 것이다. 이때부터 이름도 ‘주공’(朱公)으로 바꿨다. 이 ‘도땅의 주공’이 줄어서 ‘도주’(陶朱)가 되고, 이것이 나중에 중국 문화권에서 부호를 일컫는 대명사로 발전하게 된다.

범려가 부를 일군 방법은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구천의 검. 범려가 그대로 남았다면 이런 검으로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첫째는 노나라의 돈이라는 가난한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 부자가 되는 법을 묻자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그 가르침대로 돈은 의씨라는 땅의 남쪽에서 소와 양을 사육한 지 10년 만에 재산이 왕과 공자에 버금가게 됐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장사를 하며 물자를 쌓아두었다가 시세의 흐름을 보아 내다 팔아서 이익을 거두었는데, 사람의 노력에 기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엇갈린 두 사람의 최후

결국 범려는 (1)부국강병책 (2)농업으로 거부를 이룩하기 (3)목축업으로 왕공의 부를 만들기 (4)상업(유통업)으로 거부를 이룩하기 등 네 부문을 모두 직접 현실화해 성공한 만능의 정치인이자 경제인임을 증명한다. <사기>는 구체적으로 그가 19년에 걸쳐 세 차례나 천금을 벌었으며, 두 차례에 걸쳐 가난한 사람들과 먼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고 전한다. 나중에 그가 늙고 쇠약해지자 그는 일을 자손에게 맡겼다. 자손들은 가업을 잘 운영해 재산을 늘려 거만금에 이르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여불위와 범려를 비교하면 재미있다.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보면 어느 정도 비슷하다. 범려의 경우 거의 패망 직전까지 간 나라를 구해내 화려하게 재기시켰다는 점에서 더 극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불위의 통치로 진나라가 통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닦았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지모와 계략은 서로 특장점이 확연하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범려는 정통파적이고 충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여불위는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였다. 두 사람의 결말은 아주 대립적일 정도로 다르다. 여불위의 경우 결국 실제 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진시황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그대를 하남에 봉했고, 10만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이런 편지를 받고 그는 독주를 마시고 죽는다. 또한 진시황의 통일 제국과 그 후손들도 오래지 않아 멸망하고 만다. 이와 달리 범려는 자손이 번창하고 가업이 번창해 ‘도주’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중국문화권에 남기게 된다. 권력에 끝까지 집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컸다.

권력도 정욕처럼 ‘칼날에 묻은 꿀’이었던 것이다.


베를루스코니, 탁신, 정몽준…

부와 권력은 서로 분리된 채 견제하는 경향이 강했다. 과거 대다수 문명권에선 이런 불문율이 어느 정도 지켜져왔다. 그런 견제와 균형을 통해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지혜에서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현대에 이를수록 위협받고 있다. 미디어 발달과 함께 부를 가진 사람이 미디어의 힘을 이용해 권력까지 거머쥐려는 욕구가 커져가기 때문이다. 부과 권력 그리고 명예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부동산으로 시작해 미디어 재벌이 된 그는 두 차례 이탈리아 총리에 선출된다. (사진/ GAMMA)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동시에 추구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이탈리아의 미디어 재벌에서 총리에 오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다. 이탈리아의 경제 중심지 밀라노에서 부동산 개발로 떼돈을 번 그는 텔레비전의 미래를 일찍부터 내다보고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그 결과 <레이테4> <카날레5> <이탈리아1> 등 3개 민영방송사를 장악하고 종합출판, 영화, 인터넷, 보험, 부동산 등에서 거부를 이룩하게 된다. 그는 유럽의 명문 축구클럽 인터밀란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그는 우파 정치인으로 정치에 도전해 1994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때 부패 혐의로 기소까지 된 그가 이렇게 서유럽 최대의 사회주의 정당국가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성공을 거둔 것은 현대정치의 아이러니로 꼽힌다.

타이의 탁신 시나왓 총리도 비슷한 흐름의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다. 미국 유학파인 탁신 시나왓은 자신의 회사 어드밴스드 인포메이션 서비스(AIS)가 타이의 휴대전화 사업권을 따내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대성공에 힘입어 거부를 이룩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위성통신 사업과 디지털 방송, 인터넷 등에 진출해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 뒤 정치에 뛰어들어 하원의원, 외상을 거쳐 애국당을 결성하고 마침내 총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세계적인 부호가문 미국의 록펠러 가문도 전통적으로 ‘정치 진출은 피한다’는 가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록펠러 3세의 동생인 넬슨 록펠러가 1974년 당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지명으로 부통령에 취임해서 이 가훈이 깨졌다. 록펠러 4세도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역시 세계적인 부호가문인 미국의 듀폰 가문도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가문의 불문율이 있었지만, 4대째인 피에르 듀폰이 델라웨어주 하원의원 주지사를 지냈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인 피에르 듀폰은 198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전에 나섰다가 중도에 사퇴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그의 아들인 현대중공업의 정몽준 회장도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를 결정짓는 단계까지 간 바 있다.

필리핀에서는 이런 경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과거 마르코스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암살된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과 그의 부인으로 나중에 대통령이 된 코라손 아키노 여사는 모두 부유한 가문 출신이다.



[온 + 오프 항해지도]

▶ 중고생
- <사기열전-상·하> 사마천/을유문화사
- <중국걸물전> 진순신/서울출판미디어

▶▶ 대학생 이상
-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 Patricia Buckley Ebrey/
Cambridge University Press
- <사마천의 여행> 후지타 가쓰히키/중공신서(일본책)
- <백화 사기> 광명일보 출판사(중국책)




[COMING SOON]

자료제공, 도움말씀 기다립니다.
okh1234@empal.com

▶ 다음호: 경영자 예수

▶▶ 다다음호: 명가문의 조건1- 로스차일드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