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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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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7-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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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이 만난 세상]

▣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부산에 살 때 난 걷기를 즐겨했다. 고민이 있을 때면 방 안 구석에서 몽상에 잠겨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추궁하다 뭉쳐진 생각들을 풀어내기 위해 종종 동네 공원을 걸었다. 답답해 미칠 것 같은 한밤중에는 워크맨을 가지고 집을 나서 산책하며 골똘히 사색을 하고 돌아보면 마음이 가라앉아 쉬이 잠들 수 있었다. 길을 걸으면 끝없이 펼쳐진 길처럼 나 또한 무한히 열려 있는 것 같아 풀리지 않던 고민도 차근차근 풀어지곤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서울에 온 뒤 지리를 잘 알지 못해 어디를 가야 할 때면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선택의 여지없이 지하철을 타야 했고, 타지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 꼼짝없이 서울에 붙잡혀 살았다. 2년 전 거의 반년을 시도 때도 없이 여행을 빙자한 가출을 하여 여기저기 떠돌았던 때나 걷는 것 자체를 즐겨했던 때와는 달리 지난해부터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답답한 서울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어딜 가도 똑같이 하늘을 뒤덮은 괴기스런 건물들과 매캐한 자동차 매연으로 뒤덮인 서울은 참 걷고 싶지 않은 곳이다. 요즘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로를 늘리고 버스 전용도로를 만들고 있는 서울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편히 걷을 수 있도록 차도를 줄여 좁아터진 인도를 넓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사람들은 걷기 위해 러닝머신 위가 아닌 거리를 선택할 것이고, 좁은 차도로 인해 자동차는 줄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차들이 횡행하는 시청 앞 잔디공원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비용으로 도심 속에 산책할 수 있는 작은 공원을 만들었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전거가 부서진 뒤부터 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교통비 인상으로 인한 부담이 너무 커 신체가 견딜 만한 곳이면 어디든 걸었다. 장마가 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수유에서 대학로까지 걷고, 하릴없이 남산을 오르내리고, 부천을 돌아다니며 다시금 걷기의 즐거움을 깨달고 있다. 혼자 걷기가 지루할 때면 침묵을 즐길 줄 아는 이와 함께 걷기도 했다. 잠시의 침묵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과 걷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들은 걸으며 침묵에서 오는 교감과 신뢰를 저버리고 걷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함께 걸으실래요?”라는 말처럼 상대방에게 호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과 함께 있고 싶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은유이다.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한번쯤 마음이 맞는 이와 그저 걷기만 하는 데이트를 해볼 것을 조심스레 권유하고 싶다.

내게 걷는다는 건 기계적으로 계획된 일상을 벗어나 여유를 가지고 느림을 만끽하는 것이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속도의 세계에서 사색할 틈새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래서 요즘 난 서울에 갇혀 살았던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보고 싶은 바다든 고향 부산이든 발이 닿는 어느 곳이든 걸어볼 계획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길의 감식자인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찾기 위해 내가 태어난 세상의 길을 떠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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