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 만난 세상]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무언가를 사회에 내놓아야 하는 작업은 끊임없이 자기 물음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나 오래 전부터 기획에만 머물고 있는 나의 첫 작품에 대한 고민 또한 그러하다. 글을 쓴다는 것,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 모두 나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일 터. 매번 반복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준비되지 않은 발견에 대한 질식할 듯한 공포와 두근거림이 교차한다.
오랫동안 사람들과의 대화보다 책이나 영화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보다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몽상하거나 내가 누구인지 가르쳐주지 않는 역겨운 세상을 등지고 거리를 떠돌 때 무수한 ‘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뚜렷한 정체성이 없다는 것, 이름이 없다는 것은 매우 외로운 일이었다. 당시 내겐 속할 수 있는 집단과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한 이름들이 필요했다. 나라는 존재를 말함에 있어 정체성, 즉 이름들은 매우 중요했고 그것들을 찾기 위한 여정은 언제나 혼란스러웠다. 중심에서 이탈된 채 주변을 떠돌아야 했던 내게 이름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나를 찾으며 스스로에게 부여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겨우 찾은 이름들에 자족하며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난 항상 변해갔기 때문에 이전의 이름들은 더 이상 나를 선명하게 밝혀주지 못할뿐더러 무수한 오해와 갈등을 야기했다. 결국 내게 붙여진 이름들은 나를 호명하는 타자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고, 그 이름들은 내가 아닌 타자들에 의해 임의적으로 붙여진 것에 불과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이름이 무엇인지 질문할 때마다 “나는 나를 모른다”는 답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었다. 알지 못하는 무엇에 대해 이름을 붙일 순 없는 일이므로 난 나의 이름들을 버리기로 했다. 그때 깨달은 사실이지만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난 영화 <고>의 스기하라가 말했듯 정체불명의 물음표이고 수수께끼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그에게 붙여진 재일 외국인이라는 이름이 관리와 통제의 기능을 했듯, 내게 이름이란 나를 통제하기 위한 그물이었다. 또 기실 이름이란 나와 당신을 구분짓는 경계와 다름없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만큼 나의 주체성의 경계들은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을 듯 희미하다. 이는 진정한 주체로서 나는 매우 협소하거나 당신이 모두 나이거나 나는 없거나 혹은 그 자체가 나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알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이름을 붙이지 않는 난 아마도 영원히 내가 누구인지 모를 테지만, 무수한 나들, 당신 안의 나들, 순간의 나들, 변해가는 나들이 콜라주된 존재가 내가 아닐까? 사실 나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이 숨이 턱턱 막히는 이 글을 쓰게 된 건 난 누구이고, 나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몇년째 질문해야 하는 나의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함으로써 조금은 덜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난 영화 <고>의 스기하라가 말했듯 정체불명의 물음표이고 수수께끼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그에게 붙여진 재일 외국인이라는 이름이 관리와 통제의 기능을 했듯, 내게 이름이란 나를 통제하기 위한 그물이었다. 또 기실 이름이란 나와 당신을 구분짓는 경계와 다름없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만큼 나의 주체성의 경계들은 모호하고 손에 잡히지 않을 듯 희미하다. 이는 진정한 주체로서 나는 매우 협소하거나 당신이 모두 나이거나 나는 없거나 혹은 그 자체가 나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알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이름을 붙이지 않는 난 아마도 영원히 내가 누구인지 모를 테지만, 무수한 나들, 당신 안의 나들, 순간의 나들, 변해가는 나들이 콜라주된 존재가 내가 아닐까? 사실 나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이 숨이 턱턱 막히는 이 글을 쓰게 된 건 난 누구이고, 나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몇년째 질문해야 하는 나의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함으로써 조금은 덜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