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 만난 세상]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최근 우리는 퀴어의 삶을 재현한 영화와 시트콤을,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케이블 방송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동성애 커뮤니티뿐 아니라 이성애 사회에서도 말이 많던, 동성애를 다룬 ‘야오이’와 ‘팬픽’이 있었다. 이를 두고 동성애의 상품화와 편견을 부추길 뿐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더 이상 동성애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가 아니란 사실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일말의 편견을 가진 자들의 논리에 긴 말 필요 없이 “넌 마초야!” 단 한마디로 헤비급 펀치를 날릴 수 있는 현실에 살고 있다.
내가 자주 접속하는 어느 사이트에서 퀴어문화축제 홍보글에 달린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그들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답글을 보았다. 이러한 수사는 퀴어 영화를 즐겨보는 이성애자 여성들도 흔히 사용한다. 이들은 현실의 가부장적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다정다감한 게이 캐릭터에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투사하며 대리만족을 얻는다. 하지만 그들이 받아들이는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라는 위치를 침범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뤄지고, 그래서 여전히 ‘나는 아니지만 즐긴다’라는 논리를 가능케 한다. 그와는 다르게 ‘팬픽 이반’이라 일컫는 종족은 자신이 극구 동성애자라고 하지만,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나 할 것 없이 ‘너희들은 동성애물에 오염된 가짜 동성애자’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같은 현상은 이성애 사회와 동성애 커뮤니티 모두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양성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양성애자를 비난하는 논리는 쉽게 말해 “너희들은 동성애를 즐기다가 언젠가는 이성과 결혼할 양다리 걸친 기회주의자”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기묘한 풍경의 원인은 무엇일까? 내 생각을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퀴어에 대한 ‘닫혀 있는’ 사고 때문이 아닐까 싶다. 퀴어 영화에 열광하며 ‘나는 아니지만’으로 시작해 동성애의 관용론을 펼치는 사람이나 이성애 질서에 저항하지 않는 양성애자는 동성애를 세련되게 소비하며 퀴어가 될 가능성을 닫아놓고 즐긴다. 왜냐하면 닫혀 있을 때 쉽게 즐길 수 있고 더욱 쿨해 보이기 때문이다. 동성애 정체성을 태생적이라는 테두리에 한정짓는 팬픽 이반과 양성애자에 대한 진짜 가짜 논쟁 또한 닫혀 있음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동성애가 태생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동성애 정체성이 발명됐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동성애자들이 공유하는 정체성이란 허구적 산물일 수 있다. 이는 때에 따라 ‘후천적’ 혹은 이성애자인 동시에 동성애를 하는 이들에게 동성애자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이 퀴어의 가능성을 동성애 정체성으로 게토화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 퀴어 이성애자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시민사회가 동성애에 무한히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점에서 커밍아웃을 ‘잘’ 한다는 것은 파묻힌 퀴어의 존재를 확대하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내게 커밍아웃은 도돌이표 질문이며, 닫혀 있는 경계들과 나의 주체성을 의심하는 언어의 생성 과정일 듯싶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마치 시민사회가 동성애에 무한히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점에서 커밍아웃을 ‘잘’ 한다는 것은 파묻힌 퀴어의 존재를 확대하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내게 커밍아웃은 도돌이표 질문이며, 닫혀 있는 경계들과 나의 주체성을 의심하는 언어의 생성 과정일 듯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