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도 개성시대, 다양한 서비스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영화관으로 떠나는 여행
영화관람이 특별한 문화행사였던 어린 시절, 영화를 보고온 친구들의 자랑은 늘 이렇게 시작됐다. “나 어제 극장 구경갔다.” 극장도, 영화도 흔하지 않던 때였다. 그런데 이제 다시 ‘극장 구경’을 하는 시절이 돌아왔다. 극장마다 시설이나 프로그램에서 서로 다른 색깔로 승부하며 영화를 선택하는 즐거움 못지않게 극장을 골라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최근 들어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게임도 하는’ 멀티플렉스의 막강한 위력에 맞서 독특한 개성으로 관객을 끌어모으는 야무진 단관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씨네큐브… ‘공복감’과 ‘소화불량’ 해소?
12월2일 서울 광화문 신문로에 들어서는 흥국생명 신사옥에서 개관하는 씨네큐브. 일단 극장문을 열고 들어가면 뉴욕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미술가 강익중씨의 손바닥 그림 7500개가 만든 거대한 벽화가 눈을 사로잡는다. 맞은편에는 은은한 조명이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독일의 유명작가 잉고 마우러의 작품 <홀론즈키>다. 알록달록, 형광조명이 빛나는 멀티플렉스 내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이 극장의 성격을 넌지시 알려준다. 잠시 미술품을 감상한 뒤 주위를 살펴보면 ‘아카이브’라고 이름붙인 방이 눈에 띈다. 이곳에는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국내외 장·단편영화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비디오 아트, 뮤직비디오 비디오테입과 DVD 300여편이 국내외 영상관련 잡지들과 함께 꽂혀 있다.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또는 그냥 ‘극장 구경’을 와서 무료로 이곳의 작품들을 열람할 수 있다. 그 옆에 있는 미디어 갤러리에서는 비디오와 멀티미디어 작품들을 모니터를 통해 전시한다.
속이 훤히 비치는 누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2층에 내려가면 진짜 영화관 씨네큐브 광화문을 만나게 된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의미의 멀티플래넘이라는 이름을 단 이 극장은 씨네큐브과 아트큐브로 나뉘어 있다. 두관의 공통점은 멀티플랙스에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영화들이 상영된다는 것. 다른 점은 씨네큐브에서는 좀더 ‘말랑말랑한’ 영화들이, 아트큐브에서는 비교적 ‘인내를 요구하는’ 영화들이 상영된다는 것이다. 95년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으로 예술영화 붐을 일으켰던 영화사 백두대간이 이 극장의 운영진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임연숙씨는 씨네큐브가 당시에 표방했던 예술영화 전용관과는 다른 성격의 극장이라고 말한다. “기름진 상업영화만으로는 공복감을 느끼고 예술영화에는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관객을 위한 작품을 상영한다”는 것이 임씨가 설명하는 씨네큐브의 전략이다. 지난해 <거짓말> <아이즈 와이드 셧>과 함께 베니스영화제에서 화제가 됐던 프랑스영화 <포르노그래픽 어페어>가 씨네큐브의 개봉작. 이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부산영화제에서 화제가 됐던 애니메이션 <프린스 & 프린세스>, 빔 벤더스의 <브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등 재미에서도 빠질 수 없는 작품 13편이 2001년 상영일정표를 일찌감치 채워놓았다. 아트큐브 역시 키아로스타미, 앙겔로풀로스, 켄 로치 등 쟁쟁한 감독들의 작품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하이퍼텍 나다… 내 자리는 누구 이름일까
(사진/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의 좌석배열표(위). 전 좌석에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상영관 한쪽 벽은 통유리로 영화가 끝나면 바깥 전경을 볼수 있다) “서태지, 한석규 주세요.”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지난 8월 말 문을 연 하이퍼텍 나다 매표구는 언제나 ‘실명거래’로 소란스럽다. 관객이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든 좌석을, 네티즌들이 뽑은 문화대표 147명으로 이름붙였기 때문이다. 서태지표를 든 관객은 의자 뒤에 ‘가-1’, ‘A-66’ 따위가 아닌 서태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의자를 찾아가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러나 멀티플렉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젊은 관객을 겨냥한 하이퍼텍 나다는 ‘토털 맞춤 영화관’을 지향한다. 풀어 말하면 관객이 영화의 프로그래머가 되고 영화제의 기획자가 되는 것이다. 하이퍼텍 나다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김난숙씨는 “회원제를 운영하면서 관객의 아이디어 제안으로 개봉할 영화를 선정하고 다양한 이벤트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다의 계획”이라고 말한다. 해마다 기획안을 공모해 선발된 관객의 이름을 붙인 관객실명제 영화제도 연다고 한다. 또한 회원 가운데 추첨을 통해 선정된 사람들은 나다의 프로그래머와 함께 해외 필름 견본시에 나가서 작품선정에 ‘입김을 가하는’ 행운도 누리게 된다.
관객의 자발적 참여 외에 나다의 또다른 특징은 일년 내내 크고 작은 영화 관련 축제와 이벤트가 벌어지는 축제 극장이라는 점이다. 개관 행사로 일본영화 페스티벌을 열었던 나다는 지난달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의 개봉에 맞춰 기타노 감독 주간을 열어 <소나티네> 등 개봉작 외에 <그 여름 조용한 바다> <그 남자 흉폭하다> 등 국내 미개봉작들을 상영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키즈 리턴>에 이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 차이밍량의 <구멍>이 개봉되는 사이 3일 동안 대만 뉴웨이브 감독전을 열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등 영화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대만영화 12편을 스크린으로 상영한다. 즉 모든 작품이 개봉할 때마다 작은 영화제가 곁들여져 개봉영화에 관심있는 관객의 갈증을 풀어준다는 서비스 전략이다.
부대시설면에서는 멀티플렉스나 다른 영화관만큼 다채롭지는 않지만 나다에서만 즐길 수 특별한 경험도 있다. 영화의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는 ‘매너있는’ 관객은 오른쪽 벽의 커튼이 올라가면서 벽 전체의 통유리가 보여주는 야외 정원을 통해 어두침침해진 시야가 맑아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낮시간의 관람에만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골드클래스 시네마… 관객도 ‘귀족’ 대접
불과 3∼4년 전 곰팡내 나는 실내와 무릎이 아플 정도로 좁았던 극장들의 좌석 간격에 비하면 요즘의 멀티플렉스들은 천국에 가깝지만 러브시트와 컵홀더, 110cm에 달하는 앞뒷좌석의 넉넉한 여유공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관객을 위한 최고급 시설의 극장도 등장했다. 분당 CGV에서 지난 7월달부터 운영하고 있는 골드클래스 시네마는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 개념을 도입해 만든 특급영화관이다. 골드클래스 시네마 입구에는 팝콘과 콜라 일색의 매점이 아니라 특급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나 있을 법한 라운지와 바가 있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 소파에 기대어 앉아 간단한 식사나 와인 한잔을 즐길 수 있다. 와인 한잔은 이곳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정장으로 차려입은 직원에게 주문하면 원하는 시간에 영화를 보면서 의자 옆에 있는 테이블로 서빙을 받을 수도 있다. 200석 규모의 상영관에 30석만이 비치된 좌석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어 편하게 누워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골드클래스 시네마와 같은 프리미엄 상영관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에서 보편화되어 생일이나 약혼식 등의 파티에 자주 이용된다고 한다. 골드클래스 시네마도 소규모의 단체 행사에 자주 대여된다. 이곳을 주로 찾는 관객은 30대 이상의 전문직 종사자가 많다. 주중에는 은퇴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찾기도 한다. 입장료가 2만원으로 일반 극장의 세배가 넘지만 극장 관계자의 의하면 “주말에는 첫회를 제외하고는 전회매진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메가박스…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관
(사진/분당 오리CGV의 골드 클래스 시네마. 매점 대신 고급바가 운영되고 안락한 좌석에서 간단한 식사까지 할 수 있다) 98년 문을 연 서울 CGV강변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모든 극장들이 복합관으로 탈바꿈하면서 복합관들 사이에서도 관객모으기를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와 서비스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가운데서 단연 두각을 보이는 곳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 지하에 들어선 메가박스다. 16개관으로 동양 최대 규모인 메가박스는 지난 8월11일 개관한 지 석달 만에 관객 100만명, 점유율 90%를 기록해 98년 히트상품으로 올랐던 CGV의 성공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관’을 표방하는 이 멀티플렉스의 부대시설에 비교하면, CGV의 ‘충격적’이었던 게임센터나 웹스테이션 등은 이제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마치 우주선에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금속성 네온이 빛나는 극장 로비에는 그 자체로 흥미를 끄는 볼거리들이 멀티큐브를 통해 쉼없이 중계되고 있다. 500평 규모에 350대의 PC가 구비돼 있는 웹스테이션도 컴퓨터 한대 한대가 독특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3D 시뮬레이션 극장인 메가라이드는 10분 상영에 입장료 4500원으로 다소 비싼 가격이지만 젊은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놀이 시설이 특징이다. 움직이는 의자를 ‘타고서’ 애니메이션 <알라딘>의 램프요정을 따라 공주를 구하기 위해 떠나는 모험인 <매직 카펫 라이드>에서 관객은 쏟아지는 폭포의 물줄기와 고공낙하 때 목덜미를 파고드는 서늘한 바람을 실제 체험한다. 신촌에 사는 박남영(20)씨는 신촌주변의 극장들을 마다하고 두주에 한번은 지하철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메가박스를 찾는다. 박씨는 “극장 안에 놀거리도 많고 극장 밖으로 나가도 수족관 등 다른 영화관의 쇼핑몰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아 한나절 이상 극장에서 즐길 수 있다”면서 “이곳에 오면 오히려 데이트 비용도 절감된다”고 말했다. 메가박스쪽은 지난달부터 평일 심야관객 모두에게 콜라와 팝콘을 무료제공하는 등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에서도 다른 극장들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ZOOOOZ… 주부들이여 오라
서울 강남역 근처의 동아극장을 4개 복합관으로 리노베이션한 ZOOOOZ(주공공이)는 멀티플렉스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쇼핑몰이 없는 대신 외관으로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층마다 연결된 스텐레스 패널은 대형 배의 돛을 연상시키면서 다른 극장과의 구별짓기를 시도한다. 요즘 한 방송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집안 개조의 화신으로 분하고 있는 건축가 양진석씨가 설계한 이 건물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장실 각각의 내부에 비치된 작은 모니터. 잠시도 지루할 시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극장쪽의 깜찍한 배려다.
분당의 CGV야탑과 CGV오리는 보통 20대를 주고객으로 삼는 멀티플렉스들과 달리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강조한다. 이 두곳에는 상영관 입장이 불가능한 2∼4살들의 유아들을 위한 무료 놀이방을 개설해 주부관객의 발길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놀이방 안에 대형 실내극장 시스템이 구축돼 디즈니 애니메이션 등을 틀어 준다. 장난감으로 가득 찬 이 놀이방은 주말 저녁이면 20∼30명의 아이들로 가득 찬다.
메가박스를 운영하는 동양그룹 영상사업팀의 000(확인) 이사는 “이제 극장은 프로그램만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최소비용으로 최대한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극장이 하나의 여행장소처럼 찾게 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내야 한다”고 말했다. 극장의 절대부족 속에서 마치 당연한 듯 빼앗겼던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이제야 관객에게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사진/서울 역삼동 코엑스몰에 자리잡은 메가박스. 다른 멀티플렉스보다 앞서는 시설과 서비스로 개관 석달 만에 100만명을 돌파했다)

(사진/시테큐브 광화문의 아카이브에서는 희귀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DVD를 무료로 볼 수 있다)
속이 훤히 비치는 누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2층에 내려가면 진짜 영화관 씨네큐브 광화문을 만나게 된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의미의 멀티플래넘이라는 이름을 단 이 극장은 씨네큐브과 아트큐브로 나뉘어 있다. 두관의 공통점은 멀티플랙스에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영화들이 상영된다는 것. 다른 점은 씨네큐브에서는 좀더 ‘말랑말랑한’ 영화들이, 아트큐브에서는 비교적 ‘인내를 요구하는’ 영화들이 상영된다는 것이다. 95년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으로 예술영화 붐을 일으켰던 영화사 백두대간이 이 극장의 운영진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임연숙씨는 씨네큐브가 당시에 표방했던 예술영화 전용관과는 다른 성격의 극장이라고 말한다. “기름진 상업영화만으로는 공복감을 느끼고 예술영화에는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관객을 위한 작품을 상영한다”는 것이 임씨가 설명하는 씨네큐브의 전략이다. 지난해 <거짓말> <아이즈 와이드 셧>과 함께 베니스영화제에서 화제가 됐던 프랑스영화 <포르노그래픽 어페어>가 씨네큐브의 개봉작. 이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부산영화제에서 화제가 됐던 애니메이션 <프린스 & 프린세스>, 빔 벤더스의 <브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등 재미에서도 빠질 수 없는 작품 13편이 2001년 상영일정표를 일찌감치 채워놓았다. 아트큐브 역시 키아로스타미, 앙겔로풀로스, 켄 로치 등 쟁쟁한 감독들의 작품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하이퍼텍 나다… 내 자리는 누구 이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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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분당 CGV의 무료 유아놀이방. 주부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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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동아극장을 리노베이션한 ZOOOOZ는 실내 곳곳뿐 아니라 화장실 안에도 모니터가 설치돼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