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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보리피리 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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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6-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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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글 · 사진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나처럼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친구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집트 왕보다 더 황금빛으로 빛나는’ 보리밭 사진을 올려놓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힘없이 고개를 처박고는 살 수 없다는 듯이 익어도 꼿꼿이 머리를 들고 선 것”이 보리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듯, 가시 같은 수염까지 달고 있다.

고향집에서 보리농사를 언제부터 안 짓게 됐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통일벼가 등장해 쌀 수확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뒤부터였으니까 1980년대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니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은 이제 까마득한 옛 얘기가 됐고,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갈’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여름이면 들녘이 온통 황금빛 보리의 파도로 일렁거렸다. 보리는 밭에만 심은 것이 아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겨울논에 보리를 심었다가 일찍 베어내고 그 자리에 늦벼를 심어, 이모작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고학년이 되면 보리베기 노력봉사를 나가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보리밭에 둥지를 튼 꿩 가족이 아직 날지 못하는 겁먹은 꺼병이들을 일렬종대로 이끌고 부산히 피난길을 떠나곤 했다.

보리밭은 요즘 도시에서도 제법 구경할 수 있게 됐다. 지방자치단체가 ‘관상용’으로 도심에 작은 보리밭을 가꾸기도 하고, 화분에 보리를 심어 키우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주말농장 가는 길에도 100평가량 되는 보리밭이 하나 있어 눈에 띈다. 그런데 요즘 보리가 누렇게 익었는데도 벨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실 보리를 그렇게 조금 심어서는 기계를 쓸 수 없으니, 탈곡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보리밭을 지나다 보면 보리피리 소리가 들린다. 보리피리는 연한 보리 줄기 끝 양쪽에 3mm쯤 칼집을 넣어 납작하게 한번 눌러 만든다. 바람의 세기를 잘 조절해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 지난주에는 농장 가는 길에 부러 밭에 들어가 보릿대를 여러 개 잘라 왔는데, 바지 가랑이에 까맣게 깜부기만 앉았을 뿐 피리를 만들 만한 게 없었다. 보리가 익어갈 때쯤이면 보리 줄기가 굵고 딱딱해져서 피리를 만들기가 어렵다. 보리피리는 높낮이를 조절해가며 불기는 어렵고, 그저 ‘뿌~’하는 소리로 만족해야 한다.

좀더 악기다운 것은 버들피리다. 버들피리도 보리피리와 소리나는 원리는 같다. 버들가지를 꺾어 잔마디가 없는 부분으로 5cm 정도 껍질을 남기고 다른 부분은 껍질을 벗긴다. 그리고 남겨놓은 껍질을 살살 비틀어서 속심지를 잡아 빼내고 남은 대롱을 쓴다. 대롱의 한쪽 끝 부분 5mm가량을 겉껍질을 깎아버리고 얇은 파란 속껍질만 남긴 뒤 납작하게 한번 눌러주면 피리가 된다. 버들피리는 입으로 음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어, 고수들은 노래도 연주한다. 봄에는 아까시나무, 가을엔 뽕나무 껍질로도 피리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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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