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 만난 세상]
겸/ 10대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나이도 계급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서로의 관계를 결정짓는 호칭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게다가 그것이 일상에서 계속 부딪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일 때는.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내게 사적으로 맺은 중년남성의 호칭은 쉬이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다. 얼마 전 바로 그런 관계의 중년남성에게 ‘씨’라는 호칭을 썼다가 그의 불편한 심정을 듣곤 나와 관계 맺은 중년남성의 호칭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의 주장은 씨자 호칭은 서로의 평등을 부여하는 것처럼 호도되지만, 실상 Miss나 Mr처럼 서구적 개념이여서 서로의 차이와 거리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번 보아온 사이에 나이차로 인해 씨자 호칭을 붙이는 내게 불편을 호소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단 한번도 나이를 빌미로 차별하기는커녕 상대방에 대한 그의 사려 깊은 배려에 놀라곤 했던 내가 그에게 붙인 호칭은 적당한 거리 유지를 위해 고민 없이 쓴 것이었다. 그러니 씨자 호칭은 중년남성과의 평등한 소통을 위해서라기보단, 적절한 호칭을 찾지 못해 쓴 서툰 표현이었다. 한참 뒤 생각해보니 한국의 중년남성에게 씨라는 호칭은 그 자체로 실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대화법은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를 배려하며 쓰는 반말 문화이고, 내겐 그런 중년 친구가 단 한명 있다. 이 지면의 편집자이기도 한 그와 난 서로 반말을 사용하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하기는커녕 자기가 속한 세대를 잊어버리고 거침없이 자유롭게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번은 그가 일하는 신문사에 놀러갔다 직장 동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반말로 대화를 했다. 그때 난 속으로 한참 어린 내가 직장 동료 앞에서까지 반말을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느낄까 걱정됐다. 그와 나 사이에 반말은 합의된 사항이었지만 나이주의의 규율이 엄연히 존재하는 직장에서까지 반말을 사용했다간 동료들에게 그의 권위가 짓밟히는 모습으로 보이진 않을까 하는 갈등이었다. 난 그런 마음을 그에게 솔직히 말했고 그는 관여치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진부한 고민이고 당연한 대답일 수도 있겠지만, 난 괜찮다는 그의 대답이 참 고마웠다.
이런 상황과는 달리 일방적인 반말을 강요당할 때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중년 게이는 평상시 존댓말을 쓰다가도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는 일방적으로 반말을 한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갑자기 왜 반말을 하냐고 물어보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너처럼 어린 소년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며 게이라는 혐의를 받는 게 두려워 일반적인 소년과 중년의 대화 방식을 취하는 것이라 했다. 시원찮은 구석은 있었지만, 이후엔 그가 반말을 해도 개의치 않았다. 호칭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난 중년남성과의 대화가 즐겁다. 20대의 방황을 지나고 막 중년에 들어선 그들은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판단력을 가졌고, 불안과 안정을 동시에 지닌 묘한 매력이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이런 상황과는 달리 일방적인 반말을 강요당할 때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중년 게이는 평상시 존댓말을 쓰다가도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는 일방적으로 반말을 한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갑자기 왜 반말을 하냐고 물어보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너처럼 어린 소년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며 게이라는 혐의를 받는 게 두려워 일반적인 소년과 중년의 대화 방식을 취하는 것이라 했다. 시원찮은 구석은 있었지만, 이후엔 그가 반말을 해도 개의치 않았다. 호칭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난 중년남성과의 대화가 즐겁다. 20대의 방황을 지나고 막 중년에 들어선 그들은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판단력을 가졌고, 불안과 안정을 동시에 지닌 묘한 매력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