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노마드’의 집

512
등록 : 2004-06-02 00:00 수정 :

크게 작게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도시 유목민들이 홈쇼핑에서 이동주택을 주문할 날이 올지도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최근 문화예술 분야에서 노마드(유목민) 또는 노마디즘(유목주의)만큼 자주 쓰이는 용어가 없는 것 같다. 패션, 미술, 문학, 철학, 리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멋대로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청담동 레스토랑에서 파는 국적 불명의 퓨전 요리도 ‘노마드’고, 특정한 직업 없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여행 경비를 버는 젊은이도 ‘노마드’고, 인터넷의 힘으로 기존 정치 판도를 바꾼 노사모도 ‘노마드’다.


개인적으로는 들뢰즈의 노마드적 사유 방식을 알기 전에 에르메스 시계 ‘노마드 콤파스’를 먼저 알았다.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 시계 때문에 ‘노마드’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나침반이 들어 있는 멋진 시계였는데, 2년 전 이 시계의 론칭 투어에 참석했던 내 후배 기자는 6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발리까지 가서 주최쪽이 시키는 대로 느닷없이 보물찾기를 하고 왔다고 했다. 그때 내 생각은 ‘아, 그러니까 21세기 노블레스 노마드라는 건 부자들을 위한 빈자의 미학 같은 것이구나’ 싶었다. 가진 게 많아서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가진 게 말 등짝만해서 어디로든 끊임없이 이동해야만 하는 유목민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하는 것!

그런데 모든 걸 그렇게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이제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누구나 유목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있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들은 항상 짐을 간편하게 꾸리고 무게를 줄이는 것이 생활화돼 있다. 기능이나 효율을 유지하면서 짐을 줄이는 방법, 이것은 유목민들이 살아가면서 터득한 지혜다. 그래야만 언제 어디서나 다른 장소로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주거환경 또한 유동적이며 불안한 새로운 ‘분위기’에 따라 적응하기 시작한 것 같다. 간단한 삶의 방식으로서 벽 없는 공간과 다락처럼 변한 주택, 잦은 이동과 여행으로 복잡한 현대인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 포터블 가구 같은 것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퀴 달린 마차집이나 여행가방 안에 접어 넣을 수 있는 침대나 탁자가 있는가 하면 ‘클라우드’라는 포터블 룸을 만들어 시판하는 디자인 회사도 있다. 특히 구름처럼 부풀어지게 하여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클라우드라는 ‘방’(room)은 이동 변화에 적합한 가구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이동 주택’을 찾는 도시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 리빙 잡지에서 봤는데 전문 업체인 ㅇ이 판매하는 12평짜리 목조식 이동 주택은 꽤 근사해 보였다. 무엇보다 1500만원이라는 가격이 마음에 들었다. 단지 개인적으로는 농지를 구입하는 일이 막막해 보였다. 그런 점에서 ㅈ에서 만든 장난감 우주선같이 생긴 조립식 간이 주택은 야외나 건물 옥상에 별도의 건축허가 없이 설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띄었다.

얼마 전에는 라는 잡지에 실린 독일 건축가가 지은 도시 유목민을 위한 멋진 이동 주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곧 안방에 앉아 건축가 아무개가 만든 미니멀한 이동 주택을 홈쇼핑으로 주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이민 상품도 날개 돋친 듯 팔리는 판국인데 이쯤이야….

시간이 새로워지지 않은 병을 앓고 있는 가운데,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