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 만난 세상]
겸/ 10대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풍경 하나. 얼마 전 이라크인 학대 사진이 공중파를 통해 방영될 때 난 급히 리모콘을 찾아 채널을 돌렸다. 1년 전 사회 전체가 반전 열기로 뜨거웠을 때 나 또한 반전집회에 참여하며 이라크전에 대한 분노를 표시했다. 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1년이 넘도록 진행됐고, 언제부턴가 나의 삶과 고민 속에 이라크인들은 점점 멀어져갔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으로부터 먼 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난 무관심했다. 미디어를 통해 점령군이 저지른 잔인한 학살을 목도할 때면, 그들의 절망이 나의 평화를 침범하지 않도록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발버둥쳤다. 어젯밤 이라크인 학대 사진을 찾아보았지만, 전쟁에 익숙해진 내게 이라크 전쟁의 상흔은 타자의 일에 불과했다.
풍경 둘. 5월15일은 스승의 날이었지만,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이기도 했다. 내가 사는 대학로에서 진행된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행사는 군사주의가 낳은 무자비한 폭력과 부도덕한 이라크 전쟁 중단을 요구했다. 병역거부자들이 준비한 퍼포먼스와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의 흥겨운 춤과 노래는 지난해 이라크 파병을 거부하던 강철민씨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기독교회관 농성장에 강철민씨의 지지 방문을 갔을 때 예상과는 다른 그의 밝은 모습에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는 현재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며, 현재 남한의 병역거부자 수감 수는 502명으로 세계 최다라고 한다.
풍경 셋. 공교롭게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전날에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를 만났다. 성전환수술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갔던 그는 몰라보게 살이 쪄 있었다(그는 결국 수술을 하지 못했다). 군 입대를 일주일 남겨두고 그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처음 만난 날, 나의 첫 질문은 바보스럽게도 “그때 어디에 있었어?”였다. 자식이 트랜스젠더라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부모는 아들이 남성이 되기 위한 공인된 절차와도 같은 군대를 면제받는 것에 결사반대했다. 당시 그는 부모를 피해 고시원에서 지내며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도피 생활을 할까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입대하여 커밍아웃을 했지만 군병원에서는 “이미 군대에 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나, 입대 뒤 한동안 계속 울었다는 그의 슬픈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미었다.
이라크를 침략한 제국의 군사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려 했던 나의 평화는 묵인된 폭력으로 구성된 평화였다. 나는 너무도 간절히 평화를 원했고 무관심으로서 그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침묵으로 견뎌온 나의 평화는 어쩌면 폭력을 용인하는 또 다른 폭력일 것이다. 그 폭력은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을 향한 것이고 나의 친구가 군대에 갈 수밖에 없던 폭력이고 자신을 폭력에 방치해두었던 내게 가한 폭력이다. 그래서 난 여전히 나를 비롯해 평화를 기도하는 이들을 보면 부끄럽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풍경 셋. 공교롭게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전날에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를 만났다. 성전환수술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갔던 그는 몰라보게 살이 쪄 있었다(그는 결국 수술을 하지 못했다). 군 입대를 일주일 남겨두고 그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처음 만난 날, 나의 첫 질문은 바보스럽게도 “그때 어디에 있었어?”였다. 자식이 트랜스젠더라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부모는 아들이 남성이 되기 위한 공인된 절차와도 같은 군대를 면제받는 것에 결사반대했다. 당시 그는 부모를 피해 고시원에서 지내며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도피 생활을 할까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입대하여 커밍아웃을 했지만 군병원에서는 “이미 군대에 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나, 입대 뒤 한동안 계속 울었다는 그의 슬픈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