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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수확하세, 그리고 나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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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5-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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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글 · 사진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수확과 솎음을 할 작물이 많습니다. 수확하고 다시 씨앗을 뿌리세요.” 농장주가 보내온 메신저 내용이다. 올 들어 농장주는 이렇게 매주 한 차례씩 휴대전화 메신저로 우리가 할 일을 알려준다. 서비스 만점이다. 마침내 첫 수확이다. 농사를 잘 지었든 못 지었든 수확은 즐거운 일이다. 농장엔 여느 때보다 사람들이 많다. 휴식터에도 고기 굽는 손길보다 거둔 채소를 다듬는 손길이 더 분주하다.

케일은 지난주부터 따기 시작해야 하는 것을 일주일만 놔둬보자고 했더니 벌레들이 먼저 시식을 했다. 농약 없이 짓는 농사는 사람과 벌레가 나눠먹자고 하는 것이니 섭할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잎이 질겨진 듯했다. 모종을 사서 심은 상추는 여덟 포기를 심었을 뿐인데 아주 잘 자라 거둔 것이 꽤 된다. 씨앗으로 심은 상추도 솎고 보니 제법 된다. 이파리가 너무 작지만 비빔밥에 넣어먹으면 좋을 듯했다. 이제 막 향기를 머금기 시작한 쑥갓을 솎고, 치커리도 제법 거뒀다. 시험 삼아 겨자채를 네 포기 심어봤는데, 아직은 거둘 게 별로 없다. 그래도 모두 씻어놓고 보니 쌈거리만 한 소쿠리다.


쌈거리는 아무리 많아도 그다지 고민이 되지 않는다. 미처 다듬지 못했어도 이웃들에게 그냥 나눠주면 된다. 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날로 먹기 어려운 열무나 총각무 따위다. 거둘 때 보면 너무 많아서 이것을 어찌 다 먹나 걱정스러워진다. 네 줄 심은 열무를 다 뽑고, 총각무는 반쯤 솎았다. 김치가 많이 남았지만, 또 김치를 담기로 했다. 열다섯살 때부터 집을 떠나 살기 시작한 나는 언제부터인가 김치를 직접 담가먹고 살았다. 지금도 김장 때를 제외하곤 우리집 김치는 내가 담근다. 열무를 씻어 절이고 양념을 준비해 마무리를 하니, 여섯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낮부터 저녁까지 혼자서 쉬지 않고 일하느라 지쳐서 맛도 잘 못 느끼겠다. 고춧가루가 튀었는지 팔도 여기저리 아리다. 이래서 부인네들이 김치 담그기를 싫어하는 것일 게다. 지난해 봄농사에는 우리도 김칫거리를 심지 않았다. 이번에도 심을 생각이 없었는데, 아내가 나 없는 사이 씨앗을 뿌려놓았다. 지난해 우리 밭 옆에서 농사를 짓던 아저씨는 열무 솎는 날 “솎아드릴 테니 다 가져가지 않겠느냐”고 우리한테 제안했다.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했더니 “집에 갖고 가면 혼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다 들고 왔다가 처리하느라 우리만 혼났다. 아저씨는 봄농사가 끝나자 더는 밭에 오지 않았다. 밭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우리 밭을 자꾸 위협했다.

올해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올해 우리 옆밭은 알고 지내는 병호네 밭이다. 병호네는 지난해에도 주말농사를 했는데, 농장일을 즐기는 가족이다. 첫 수확을 끝내고 감자에 북을 주고 토마토 곁순을 따주고 나니, 병호 아빠가 딸 수민이와 함께 뒤늦게 농장에 도착했다. 병호네는 열무와 총각무를 우리보다 훨씬 많이 심었고, 배추까지 심었다. 솎는 일을 도와주면서 나는 자신을 위로했다. “저 많은 걸 다 어떡하시려나?” 그래서 주말농장을 하다 보면 나눔이 의무가 된다. 농사지은 것을 버리면 죄받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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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