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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바둑] 승부와 유희를 뛰어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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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5-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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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바둑]

21세기 두뇌 스포츠의 총아 ‘바둑’… IT · 금융자본과의 만남 속에 올림픽 넘보며 새로운 시대로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지난 3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가장 뛰어난 업적을 거둔 분야는?”


1. 양궁 2. 축구 3. 쇼트트랙 스케이팅 4. 국제영화상 수상 5. 국제논문 게재 수 6. 휴대전화 세계 생산 점유비율 7. 문화콘텐츠 수출증가율 8. 스타크래프트 국제대회 9. 바둑 10. 노벨상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짐작하시겠지만, 정답은 바둑이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잘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바둑이 사실상 한국과 한국인의 이름을 해당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게 드높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둑은 지난 2001년 하반기부터 2003년 상반기까지 세계대회란 세계대회에서 한국이 23차례나 연속으로 우승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잉창치배, 삼성화재배, 후지쓰배, LG기왕전, 훈란배, 농심신라면배,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 도요타&덴소배….

세상에 어떤 분야도 이처럼 한국인이 절대 우위를 점하며 우승을 독차지한 분야는 없다. 온 국민이 그토록 열광한 월드컵도 그저 한 차례 4강에 들어갔을 뿐이다. 아무리 양궁과 쇼트트랙이 한국의 메달박스라고 하지만 그토록 20여 차례나 연속으로 금메달을 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세계 바둑인구가 인터넷에서 만난다

2004년 5월 초 한국기원 사이트는 대단히 흥미로운 뉴스 하나를 보도했다.

“한국의 세계사이버기원(주)이 일본기원 인터넷 대국 서비스 사업자로 선정돼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한국·중국·일본 3국의 통합바둑 서비스를 실현하게 됐다. …앞으로 펼칠 사업의 내용은 인터넷 대국 서비스를 중심으로 국제 레이팅 사업(세계프로기사 및 아마추어 강자 랭킹 매기기), 기타 인터넷 관련 사업 등 인터넷 바둑 관련 사업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 뉴스의 핵심은 대략 다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한국이 가장 우수한 국제바둑대회 성적에, 가장 뛰어나다는 인터넷 바둑 서비스를 결합해 세계 인터넷 바둑 시장을 선점했다.
(2)1차적으로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바둑애호가 수천만명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인터넷으로 바둑을 둘 수 있다.
(3)마침내 전 세계 바둑인구가 하나의 사이트에서 만나서 대국하는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1999년 열린 잉창치배 컴퓨터 바둑대회에서 컴퓨터프로그램끼리의 대국 기보. 백52, 흑75 같은 수는 컴퓨터 바둑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수이다.
과거 유한 계층의 오락 정도로나 치부되던 바둑이 어느덧 사랑방과 담배 연기 자욱한 기원에서 벗어나 21세기 수많은 인류가 어울리는 무한의 디지털 공간으로 찬란하게 비상하고 있다. 나아가 그 바둑의 콘텐츠와 테크놀로지 면에서 한국인이 우수성을 발휘하며 당당하게 선두로서 치고 나가는 형국인 것이다.

바둑은 정보기술(IT)과 접목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자본과도 조우하기 시작했다. 세계 금융자본의 대표 브랜드 가운데 하나인 JP모건이 바둑에 소액이지만 ‘투자’하고 나섰다. 올해부터 대만기원이 출범시키는 새 국제바둑대회에 ‘JP모건배 아시아바둑초청대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JP모건배는 우승 상금 200만 대만달러(한화 약 7천만원) 수준으로 세계바둑대회 가운데 B급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금 액수나 현재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자본이 바둑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동아시아 4개국 기업(잉창치그룹·삼성·LG·도요타자동차·춘란그룹·동양그룹·농심·한국담배인삼공사·일본항공 등)만이 스폰서로 나서던 바둑에 이제 본격적으로 다국적 브랜드, 그것도 금융자본이 결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간단히 지나칠 일이 아니다. 오히려 (1)동아시아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 가능성 (2)인터넷 문명의 발달에 따른 바둑 세계화의 확산 가능성 등에 힘입어 21세기형 문화코드인 바둑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과 투자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 바둑의 비약적인 성장에 따라 전 세계 바둑 고수들을 참여시키는 훨씬 편리하고 다양한 인터넷 바둑 이벤트가 활발하게 개발되고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바둑을 즐기는 미국인들.
이런 기세를 타고 현재 바둑을 올림픽 종목으로 진입시키려는 움직임도 동아시아 3개국을 중심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일본 기원이 199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맹 신청을 내면서 본격화된 이 움직임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개 바둑 경기를 개최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 아래 일본·한국·중국이 힘을 합쳐 재추진할 예정이다. 바둑이 국제올림픽위원회의 가맹 단체가 돼 공식 올림픽 경기가 되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이 가운데 국가별 협회를 전 세계에 75개 이상 조직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현재 국가별 바둑협회는 66개국 수준까지 와 있다. 한국에서도 세계적 움직임에 발맞춰 한국기원이 지난 2002년 대한체육회에 인정단체로 가입한 뒤 2003년부터 전국체전에서 전시종목으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정식종목?

이미 IT산업이나 금융자본 및 기업홍보와 접목된 뒤 올림픽을 1차 목표로 달려가는 바둑은 21세기형 문화산업의 가능성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문화 콘텐츠 산업의 강점으로 꼽히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례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만화 <고스트 바둑왕>(일본 원제 ‘히카루의 바둑’)의 예를 보자. 히카루라는 소년이 고대 바둑고수의 혼령을 만난 뒤 벌어지는 내용을 다룬 이 일본 만화는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뒤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됐다. 나아가 이제는 영어판, 불어판, 한국어판 등으로도 번역돼 세계 시장으로 나가고 있다. 이와 함께 신포석을 공동 창안한 뒤 2차대전을 전후해 그 유명한 ‘10번기’로 일본 바둑계를 사실상 평정해 ‘20세기의 살아 있는 기성’으로 추앙받는 중국 출신 오청원 9단의 일대기를 중국에서 TV드라마용 영화로 제작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일본만화 <히카루의 바둑> 표지. 우리나라에 <고스트 바둑왕>으로 번역된 이 만화는 영어 · 불어로도 출판돼 크게 히트했다.
바둑은 이처럼 21세기 들어 새롭게 무장한 채 중흥기를 맞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바둑인구는 약 7천만~1억명 정도로 추산된다. 중국이 약 3천만명 정도, 일본이 2천만명, 한국이 1천만명으로 집계된다. 여기에 대만·홍콩·싱가포르 등 동남아의 화교권, 그리고 유럽·미국·캐나다·라틴아메리카·오스트레일리아 등 오세아니아 등에 각각 수천~수십만의 바둑인구가 흩어져 있다.

한국이 새로운 문화코드인 바둑 분야에서 현재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전망은 그리 밝다고만 하기는 어렵다.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생산할 시스템과 그 기반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바둑 실력이라는 콘텐츠에서 볼 때 한국의 강점은 몇 가지 요인에 기반한다.

(1)국제기전이 제한시간 3시간으로 정착하면서 한국인과 한국 기사들의 조건과 기질에 잘 들어맞는다.
(2)제한시간 때문에 실수가 상대적으로 많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전투력이 강한 바둑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전투력을 강조하는 순장 바둑의 전통을 지닌 한국 바둑이 이 전투력 측면에서 더 강해질 수 있었다.
(3)한국인의 솔직하고 가식 없는 기질이 기사들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충암고 출신을 중심으로 한국기계의 정보공유·공동연구의 분위기가 크게 확산됐다.
(4)한국은 컴퓨터를 바둑의 공동연구와 보급에 가장 유효적절하게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과 일본의 대단한 저력

그러나 이런 상대적 우위 요소는 모두 경쟁국이 복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공동연구는 이미 중국의 기사들이 활발하게 복사하고 있다. 나아가 소수의 천재형 기사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한국 바둑은 결정적으로 취약하다. 이와 함께 국제 바둑이 3시간짜리로 단축되는 등 현대화되고 있지만, 더욱 복잡해지고 바빠지는 현대화의 속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바둑의 대국시간은 역시 지나치게 길다. 현대인을 끌어들이는 데 점점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한국 바둑은 바둑인구의 두터움과 대국시간의 스피드라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중국이 바둑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13억명을 웃도는 인구의 두터움에 시간에 크게 구애하지 않는 국민성과 라이프스타일….

‘살아있는 기성’ 중국 출신 오청원 9단의 10번기 모습 회화. 그의 일대기는 중국에서 TV드라마용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나아가 일본의 저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일본은 중국에서 전래된 바둑을 발전시켜 현대 바둑으로 정착시킨데다 바둑의 이론화, 세계화 등에 가장 돋보이는 공헌을 했다. 만일 바둑이 올림픽으로 정착된다면 가장 큰 공로자는 역시 일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국제용어는 일본식으로 정착될 가능성이 높다. 바둑은 ‘고’(Go), 공제는 ‘고미’(Gomi) 등으로 말이다. 어느 의미에선 이렇게 ‘기본을 점령하는 것’이 일정 시기에 몇개의 국제 타이틀을 따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 기사들이 국제기전의 ‘1일 대국-3시간 제한시간’ 때문에 자신들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성적을 진심으로 수긍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과연 이런 도전을 한국 바둑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러시아의 수학교수 라자레프(Lazarev. A. V.)는 지난 2001년 발표한 ‘고대 바둑이 현대과학과 경제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바둑의 운명과 관련해 대단히 정곡을 찌르는 문제를 하나 제기한 바 있다.

“바둑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단순한 놀이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는 결론적으로 “솔직히 말해서 바둑을 과학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학은 일반적으로 자연 연구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든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이용할 수 있든가 하는 데 반해 ‘비록 바둑을 둘 때 최적의 연속수를 두었다고 할지라도 바둑판 이외에는 어디서도 그 수가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바둑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바둑이 라자레프가 함의하듯 “새로운 수학적 도구와 방법을 연구개발하기 위한 시험대” 정도로 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돌파구를 열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는” 그 무엇을 보여주든지 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바둑은 천문학에서 나왔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다. 이건 마치 어디선가 지나왔던 것 같은 길이 아닌가? 살아 있는 기성 오청원 9단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웬일인가?

“원래 바둑이라는 것은 고대 중국의 철학인 360의 음양, 즉 천문학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대의 천문학은 천체를 360으로 따졌거든요. …당초에 바둑은 승부를 겨루는 유희가 아니고, 천문을 연구하기 위한 어떤 도구나 장치가 아니었을까요?”

처음과 끝이 같다?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우리는 전쟁 대용품으로서의 바둑, 승부를 가리는 바둑, 유희로서의 바둑에서 벗어나 그 근원부터 되찾아야만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리알 유희’와 바둑

바둑은 과연 인류에게 어떤 존재일까? 현재 바둑을 스포츠-엄밀히 하면 두뇌 스포츠-로 분류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시키려는 움직임으로부터 학문의 하나로 정립하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는 양상은 이 물음이 얼마나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가를 잘 반증해주고 있다.

<유리알 유희>를 쓴 헤르만 헤세.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바둑의 위상과 관련해 매우 흥미 있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1997년 <월간 바둑>에 기고한 ‘유리알 유희와 바둑’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헤르만 헤세의 철학소설에서 묘사한 이 유희가 사실상 오늘날의 바둑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나타냈다.

다음은 그 요지이다.

“헤세의 이 장편소설에서 유리알 유희는 마치 중세의 귀족이 모두 무술을 배우고 고대 희랍인이 철학을 하듯, 미래의 인간이 최고선으로서 배우고 익히는 음악과 수학과 명상이 종합된 놀이다… 말하자면 유리알 유희는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가치의 상징인 동시에 가장 아름답고 자혜로운 예술적 창조적 경지인 것이다… 20년 전의 인상으로는 주역에서의 괘(卦), 효(爻)를 잡은 것이 이와 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제 바둑알이 유리알 유희에 보다 접근한 놀이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인간이 고안해낸 놀이 중 가장 예술적이고 이성적이며 선(禪)적인 것들이 결합된 최고의 놀이가 바둑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모르는 대로 인상을 말하자면, 주역의 우주관을 놀이로 구체화시킨 것이 바둑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놀이 중에서 가장 추상성이 높은 놀이일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헤세가 동양에서 발견한 선자, 성자의 지혜로 만들어낸 유리알 유희를 우리가 실제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헤르만 헤세는 철학장편소설인 <유리알 유희>를 집필하는 데 10여년의 세월을 쏟아부었으며, 마침내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온 + 오프 항해지도 ]

▶ 중고생
-www.usgo.org
-www.baduk.or.kr
-<요순에서 이창호까지> 박치문/청년사 ☞

▶▶ 대학생 이상
-<바둑의 발견> 문용직/부키
-<바둑철학> 박우석/동연
-<현대바둑의 이해> 정수현/나남출판




[ COMING SOON ]

자료제공, 도움말씀 기다립니다.
okh1234@empal.com

▶ 다음호: 클레오파트라- 세상을 지배하려 한 최고의 미인☞

▶▶ 다다음호: 링컨- 무력으로 관철시킨 미국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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