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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상을 향한 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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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5-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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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이 만난 세상]

겸/ 10대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최근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을 하나 둘 되찾기 시작했다. 사실 잊어버린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감당하기 힘든 과거의 기억을 갖다 버린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제야 그 기억들을 하나씩 되찾기 시작하며 과거와 그것들로 구성된 현재의 나와의 화해를 시도하기 시작했음이다. 이렇게 나와의 화해를 시도하게 된 배경에는 몇 달전부터 시작한 요가가 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요가만을 통해 성숙한 자기 수련이 가능할 순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내가 다니는 ‘세상 속으로 가는 요가원’은 교수 성폭력 사건을 공개한 경험이 있는 요가원 선생님이 여성을 위해 연 요가원이다. 처음 요가원에 가게 된 것은 신경성 불면증과 만성적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를 차마 두고 볼 수 없던 친구가 “이제 우리도 지난 상처를 치유하고 피해자 정체성을 벗어나야 할 때이지 않느냐”며 등록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독 밤이 되면 신경이 몹시 예민해져 피곤에 지친 몸을 달래느라 새벽반 수업에 단 한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성주의 저널에서 교수 성폭력 사건 뒤 요가원 열기까지를 다룬 선생님의 인터뷰를 읽고 그날 밤을 꼬박 새운 뒤 요가원으로 달려갔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수업을 끝내고 선생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선생님과 함께 죽을 떠먹으며 나의 짐들을 풀어놓았다. 꼭꼭 숨겨두었던 나의 이야기를 들은 후 선생님은 성폭력 사건을 겪으며 너무 힘들었던 경험을 꺼내놓곤 당시 자신에게 요가가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거라며 나 또한 요가를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말했다.


현재 난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고 있다. 지도자 과정이라고 해서 요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다. 선생님의 이력과 소수자를 위한 요가원의 운영방침 때문인지 지도자 과정을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잘한 상처들을 짊어지고 이곳을 찾게 된 사람들이다. 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도자반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은 묶여 있는 것들로 이뤄진 곳인 듯했다. 묶여 있는 관계, 묶여 있는 상처, 묶여 있는 희망, 묶여 있는 요가원의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사랑과 증오의 무책임한 감정들 사이에 오고가는 묶여 있는 아픔들.

무엇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요가원에 이르게 하는 힘은 상처를 모두 털어놓고 각자의 치유를 모색하는 요가 공동체의 사람들 때문이다. 교수 성폭력을 겪은 선생님과 나의 경험이 남긴 흔적이 다르듯 요가원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결국 그들의 어깨에 얹힌 무게들은 묶여 있는 세상이 낳은 짐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될 과제인 것이다.

웰빙이라는 21세기형 트랜드에 진정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난 묶여 있는 세상의 아픔을 자기 안의 성찰로 치유해 진정으로 웰빙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나부터 우리 요가원의 이름처럼 세상 속으로 천천히 다가갈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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