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실업’을 즐겨라, 밥그릇 채우는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리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걸핏하면 사표를 써온 인생이다. 한번은 오늘 당장 직장을 그만두지 않으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 출근길에 쓴 사표를 우편으로 발송하고는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고속버스에 올라탄 날도 있었다. 내 자신이 워낙 철이 없고 경망스러워서 그러기도 하거니와 잡지사 여기자라는 직업이 그만큼 고단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드라마에서 능력 있고 자유분방한 여자들의 ‘때깔’ 나는 직업으로 곧잘 그려지지만, 현실은 환상과 아주 다르다. 오죽하면 여기자로 성공하려면 ‘개처럼 일하고 남자처럼 사고하고 여자처럼 행동하라’는 말이 있을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단한지는 열 가지도 넘게 열거할 수 있지만, 하도 지겨워서 그 일은 그만두고 싶다.
내 선배든 후배든, 혹은 동료든 사정은 비슷하다. 누구나 1년이면 열두번 마음속으로 사표를 쓴다. 어떤 이는 무슨 부적이라도 되는 양 사표를 1년 내내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고 다닌다. 그런데 대체로 넣어두고만 다닌다. 도시가 싫어도 도시를 떠날 수 없듯, 직장이 싫어도 직장을 떠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대신 사표를 가슴에 품은 인간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중에 직장을 그만두면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얘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난 직장인이 되고 난 뒤 오히려 이런저런 꿈이 많아졌다. 보통 대졸생들이 선망하는, 우아하게 밥그릇을 채울 수 있는 일과는 무관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생산적인 일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개중에는 ‘아프리카에서 다친 야생동물을 보살펴주며 살기’와 같은 다소 대책 없는 일도 있지만, 충분히 밥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인 아이디어도 많다. 훌륭한 장인 밑에서 목수 일을 배워서 소박하고 아름다운 가구와 집을 만든다거나,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그 수많은 펜션과 고급 민박집을 대상으로 방마다 꽃을 공급한다거나 하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한 선배는 얼마 전 그 좋다는 패션지 데스크 직함을 버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뭘 했냐 하면 국립공원을 돌며 희귀 식물의 씨앗을 채취하고 유해 식물을 제거하는 자원봉사(ATCV라는 프로그램)를 하고 왔다. 그리고 이제는 서울에 돌아와서 자연에서 자신이 얻은 혜택들을 어떻게 하면 도시인들에게 나눌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통화 중에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광주에 갔다가 무명 의상을 만드는 디자이너 문광자씨를 만났어. 지금 미국에서 전시 중인데 옷이 정말 아름답더라. 그런데 그분 말에 의하면 요즘은 아무도 전통 베짜기를 하려고 들지 않아서 무명 천이 엄청 비쌀뿐더러 구하기도 무지 어렵다는 거야.”
40만 청년 실업자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어차피 일자리는 없다. 정부가 나서도 별수 없다. 당신들 머릿속에 있는 일자리는 언제나 한결같고 그 자리는 몇개 안 되는데 정부가 무슨 도리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하지만 사람들이 누구나 아는 일자리가 없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체험해라. 오감을 열고 체험하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나만의 멋진 일자리를 창조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꾼다. 그래서 항상 불행하다. 기왕이면 당신들이 그렇게 소원하는 직장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실업자가 되라. 여행하며 배우며 경험하며 실업 상태를 최대한 즐겨라. 밥그릇을 채우는 일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