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스러운 모던락으로 돌아온 이승열… 굵은 선과 섬세한 결을 함께 내는 오묘한 목소리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1995년 전태일 25주기이던 해, 감독 박광수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스크린 위에 부활시켰다. 민노총의 집회 장면에 흐르는 운동가로 시작한 영화는 ‘청년이 왜 불꽃이 되었는가’를 얘기했고, 모던록 밴드 ‘유앤미블루’(u&me blue)의 노래와 함께 막을 내렸다. 당시 사람들에게 낯선 모던록을 배치한 건 ‘전태일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싶은’ 감독의 의지 때문이다. “엄마에게 물어보았지, 설거지같이 쉬운 인생은 없을까”(영화 삽입곡 <그대 영혼에>)라고 나지막하게 던진 물음은 앞서 가버린 한 청년 노동자의 고뇌를 90년대식으로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유앤미블루’ 해체 뒤 미국 돌아갔지만…
그러나 80년대 헤비메탈의 잔향이 남겨진 90년대 초·중반의 척박한 한국 록 신은 유앤미블루의 ‘현재성’을 담보해주지 못했다. 재미동포 1.5세대인 이승열·방준석은 한 음반제작자의 눈에 띄어 한국에 건너와 1994년 1집, 1996년 2집을 냈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1997년 첫 단독공연을 끝으로 활동은 중단되고 낯선 음악에 열광하던 팬들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흩어진 역사와 기억의 파편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재생되는가 보다. 원내 진출한 진보정당은 첫 공식 일정으로 경기도 마석의 전태일 묘소를 참배했고, 그의 누이 전순옥씨는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를 발간했다. 그리고 한때 그들의 ‘전부’였던 음악을 접은 두 이방인도 천천히 이 땅에 다시 뿌리내리고 있다.
밴드 해체 뒤 방준석은 영화로 눈을 돌렸다. 1997년 영화 <꽃을 든 남자>를 기점으로 <텔미썸딩>(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2001년), (2002년) 등 굵직한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그는 2003년 영화 〈…ing〉에서 미 대학시절 룸메이트이자 음악적 동료인 이승열의 발라드곡 <기다림>을 채택한다. 이승열을 기억하는 사람, 모르는 사람, 여러 사람들은 잔잔한 울림이 있는 이 노래에 귀기울였고, 그는 천천히 대중에게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간 뒤 기나긴 망설임과 방황을 겪어야 했던 그는 마침내 지난해 12월 1집 <그날, 기억, 저편에…>를 내놓았다.
햇볕 내리쬐는 봄날, 소속사인 ‘플럭서스’ 사무실에서 마주한 이승열(35). 그의 표정에선 편안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7년 만에 돌아온 그는 첫 단독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잠시 휴식 중이다. ‘우울 가득한 사람’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부드럽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한대수씨에게 많이 배웁니다.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은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죠. 그분에게 있었던 8년의 공백기도 남다르게 느껴지고요.” 음악적 모델이 되는 선배 음악인에 대한 존경을 표한 그는 자신의 작업방식을 얘기했다. “전 작곡가처럼 ‘한곡 뽑는’ 식으로 작업할 필요가 없어요. <기다림>도 ‘발라드곡’이란 형태를 의도하지 않고 ‘간단한 반주에 맞춰 준석이랑 노래하면 좋겠다’는 실마리로 만들었죠. 개인적인 단서로 작업하지만 듣는 분들은 각자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김광석처럼 숨소리 들리는 무대 만들 터”
그의 복귀는 오랜 세월 ‘유앤미블루’ 음반 두장 끼고 있던 팬들은 물론 음악적 입맛이 고급스러워진 국내 대중음악 애호가들에게도 반갑다. 솔과 블루스의 정서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록 사운드는 예전보다 침착해졌지만 굵은 선과 미세한 흔들림이 동시에 느껴지는 건 여전하다.
그의 목소리는 오묘하다. 낮은 음역대에선 끝이 감기고 높은 음역대에선 깨끗하게 뻗어나간다. 섬세한 결을 살리는 동시에 쭉 앞으로 내보내는 그의 목소리는 포크의 김광석을 떠올리게 한다. 기교가 싫다는 그에게서 화려함이나 꾸밈을 느낄 수 없지만 소박한 정서엔 인생의 여러 단면들과 다양한 표정이 담겨 있다. “나중엔 악기를 걷어내고 싶어요. 김광석씨처럼 기타 하나와 목소리 하나로, 여백이 많고 숨소리 들리는 무대를 만들었으면 해요.” 한 음악평론가는 그의 음악을 ‘어덜트 컨템퍼러리 록’이라 정의했다.
그에게 다시 음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물었다. ‘음악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불안과 가족에 대한 도리, 한국에서 경험한 상업적 실패와 돌아간 미국에서 느낀 벽 사이에서 고민했던 그가 ‘음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까닭이 궁금했다. 그는 3초의 휴지를 두더니 ‘신앙의 힘’이라 답한다. 의외다. 하지만 종교적 색채가 직접 드러나지 않는 그의 노래가 허무함을 얘기할 때, 동시에 ‘구원’이란 단어를 연상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중은 길들여지는 거라 생각해요. 저도 대중의 한명이죠. 사람들은 각자 취향에 맞춰 선택하고 자신이 자신을 길들이게 되는 거죠.” 그가 생각하는 ‘대중’의 모습이다. “대중에게선 제 작업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를 기대합니다. 예상되는 상처를 무릅쓰고 개인적 작업을 공개하는 게 쉽지 않죠. 일기장을 보여주듯 여전히 창피한데 좀더 뻔뻔해지려고 애쓰고 있어요”라며 웃는다. “다만 사람들의 진심 어린 제스처들을 읽고 마음 깊이 간직하며 음악작업의 에너지를 얻고 싶어요.”
오랜 인연을 맺어온 영화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 타이틀곡 〈Secret〉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진지한 음악에 농담 섞인 화면을 얹은 이번 뮤직비디오에 이승열도 만족한다. 5월엔 클럽 공연과 방송 출연이 있고, 6월12일엔 서울 정동극장에서 다시 공연을 열 계획이다. 내친 김에 ‘유앤미블루’ 음반도 재발매했다. 수년간 제작사가 소량 복제를 거듭하고 인터넷에서 중고품이 고가로 거래됐던 음반이다. 여전히 유효한 감각과 완성도를 보이는 1집 <나싱스 굿 이너프>(Nothing’s Good Enough), 2집 <크라이… 아우어 워너비 네이션>(cry our wannabe nation)에선 5개 채널의 기타에 묻힌 목소리가 몽환적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고가로 거래되된 예전 음반도 재발매
그는 이번 1집에 대해 “조금 더 내지르는 맛이 있어야 했다”고 아쉬움을 표한다. 개별 곡에 신경쓰다보니 막상 음반에서 ‘터질 것 같은’ 프레이즈나 훅이 부족하게 됐다고 평한다. 다음엔 더 다이내믹해질 듯하다. 영화 <원더풀 데이즈>의 주제곡 <비상>에서 아득한 지평선을 보여줬던 그는 어찌됐건 다시 음악을 하기로 ‘결정’했고, 이젠 자신의 지평선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 코가 이렇게 잘생겼으니 그걸 노래해봐야겠구나”라기보단 “넌 그냥 내 아들이니까”라는 마음으로 음악을 한다는 그의 다음 행보들이 궁금하다.
불면의 밤, 창문을 열고 서성거리는 당신에게 권한다. 삶에 절어버린 일상에서 잠시나마 시간의 벽은 지워지고 노래는 우릴 위로해줄지 모른다.

이승열은 “사람들의 진심 어린 제스처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음악작업의 에너지를 얻고 싶다”고 한다.(사진/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