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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화- 동화처럼 그린 시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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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5-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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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세대에 대한 쓸쓸하면서도 애정어린 연민 <효자동 이발사>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최근 한국영화의 큰 흐름 가운데 하나는 현대사가 중요한 영화적 소재로 채택되고 있는 현상이다. 관객 동원 1천만을 기록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모두 그랬다. 신인 임찬상 감독의 첫 연출작 <효자동 이발사> 역시 효자동이라는 청와대 옆동네에서 바라보고 겪는 1960~70년대를 그린다. 같은 역사극이지만 <효자동 이발사>가 지나간 시대를 반추하는 방식은 앞의 영화들보다 우회적이고 동화적이다. 물리적으로는 권력의 핵심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효자동에서, 권력과는 멀고도 멀게 느껴지는 이발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의 현장이라는 전제부터 그렇다.

사진/ 씨네21 손홍주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이발사 성한모(송강호)는 사사오입 개헌이 뭔지 알 생각도, 별 관심도 없고 대통령 선거 투표도 동네 반장이 시키는 대로 번호를 찍는 둔하고 평범한 소시민이다. 반공의식도 남다르지 않지만 우연히 (가짜)간첩을 잡는 바람에 대통령 표창을 받고 청와대 전속이발사라는 ‘영예로운’ 자리에 오른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의 얼굴에 칼을 댈 수 있지만 실은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하는 청와대 이발사의 모습은 역설적이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에도 다녀오며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지만 그가 가진 자부심은 실은 두려움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남파간첩이 옮겼다는 ‘마루구스’(마르크스) 설사병 유언비어로 청와대가 간첩사건을 조작할 때 하필 열살짜리 아들 낙안(이재응)이가 물똥을 싸자 그는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아들을 직접 파출소로 데려간다.


<효자동 이발사>는 엄혹했던 한 시대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지만 그 톤은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동네 사람들에게서 들은 사사오입을 대비시켜 자신이 임신을 시킨 이발소 조수 민자(문소리)에게 아이 낳을 것을 설득하거나, 4·19 혁명의 현장 속에서 만삭의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다가 의사로 오해를 받는 등 한모의 모습은 우습다. 그러나 슬프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아들이 남산으로 끌려갔을 때 그는 자신의 머리를 자르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지만 이내 지나가는 차의 경적에 몸을 비척거리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만다. 송강호의 빼어난 연기를 바탕으로 전해오는 이런 희비극적인 모습을 통해 영화는 현대사의 주요 계기들 속에서 무기력했지만 묵묵히 시대를 감내하며 살아온 아버지 세대에 대한, 쓸쓸하면서도 애정어린 연민을 보여준다.

낙안이 받는 고문실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전등놀이 풍경이나 북파간첩들의 집단 설사 등 우화의 수위가 튀면서 어색한 부분이 군데군데 드러나는 아쉬움도 있지만 <효자동 이발사>는 대체로 우화와 현실을 무난한 비율로 배합해 지나간 시대의 아버지에 대한 초상을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게 그려낸다. 가장 엄숙하거나 비극적인 순간, 엇박자의 실소를 유발하는 송강호의 한 발짝 비껴난 연기도 뛰어나지만 한모의 아내이자 낙안의 엄마 역할을 한 문소리의 연기는 극 중에서 비교적 작은 비중인 민자가 주인공 가운데 하나로 느껴질 만큼 탁월하게 정곡을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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