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농구판의 실험 ‘잡초 만세’

335
등록 : 2000-11-22 00:00 수정 :

크게 작게

고졸 출신 LG 김태환 감독의 승부수… 학맥이 주름잡는 농구계에 신선한 충격

(사진/농구계의 오랜 폐해인 학벌을 파괴하는 LG세이커스 사령탑을 맡은 김태환감독)
이른바 명문이라고 하는 좋은 학교를 나오면 출세하는 데 꽤 도움이 되는 것은 스포츠계라고 예외가 아니다. 흔히 프로는 실력으로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한다. 스포츠는 땀을 쏟는 만큼 결과가 나온다고도 얘기한다. 하지만 콩심은 데 콩 나고, 팥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곧이곧대로 안 될 때도 있다. 선수 시절에 실력이 최고라는 신념을 가진 알 만한 스타는 지도자로 입문하고 나서야 학맥·인맥이 고비마다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을 알고 우리 사회의 학연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실감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국내에서 저변이 비교적 넓은 3대 프로스포츠를 꼽자면 야구, 축구, 농구를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학맥이 가장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종목이 농구일 게다. 코트의 양대 학맥은 연세대와 고려대. 3대 학맥으로 확대한다면 80년대 중반 이후 허재, 강동희, 김유택 같은 스타의 힘을 빌려 대약진한 중앙대가 포함된다. 이중 연세대, 고려대 패밀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학교 브랜드의 후광을 업고 농구계의 주류로 행세해왔다. 프로농구 출범 뒤 지난 3년간 10개팀 감독의 7∼8할이 두 학교 출신이었다. 국가대표감독도 대물림하다시피 했다.

우수 선수 싹쓸이로 로열패밀리 형성


(사진/농구계의 로열패밀리를 형성하고 있는 연세대와 고려대의 경기모습)
로열패밀리의 혈통이 얼마나 농구판을 주름잡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프로농구 2000∼2001시즌을 앞두고 10개 구단 등록선수 122명(외국인선수 제외)의 연봉을 조사해보니 1억원 이상이 25명이 되었다. 그 가운데 3명을 뺀 22명이 연세, 고려, 중앙대 출신이었다. 고려대 9명, 연세대 7명, 중앙대 6명순. 비 3개대 출신은 LG의 조성원(명지대·연봉랭킹 9위), SBS 김성철(경희대·13위), 현대 추승균(한양대·16위) 3명뿐이다. 10개 구단 현역감독의 출신대학을 봐도 연고대 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연세대 5명, 고려대 2명, 중앙대 한양대 각 1명, 고졸 1명이다. 유일한 고졸은 LG의 김태환 감독으로 프로농구 최초의 고졸감독이다.

이같은 학맥 불균형은 양교가 우수한 고교선수를 싹쓸이 스카우트해서 배출했고 그 스타들이 또한 순탄하게 지도자로 성장한 데서 비롯됐다. 현재 프로농구는 용병 2명을 제외하면 똑똑한 국내선수 3명만 보유하면 언제든지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운동. 3대 패밀리 출신이 주전선수로 구성된 현실에서 그 대학 출신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용인술에서 나무랄 게 못된다. 또한 한국의 프로농구는 대학농구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고졸선수의 프로직행을 제도적으로 막고 있기 때문에 농구로 승부를 겨루려면 일단 명문대학을 선택하는 관행이 남아 있다.

고졸 출신 스타와 감독이 주류가 될 수 있는 야구, 축구와 토양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농구선수의 인생이 어떤 대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셈이다. 지난해 12월 신인드래프트 사례도 뿌리깊은 학맥의 일단을 보여준다. 전체 1순위 이규섭(삼성)부터 7순위 이정래(LG)까지 지명하고보니 지명팀 감독과 지명선수의 출신 대학이 공교롭게도 같았다. 우연의 일치로 봐넘기기 어려웠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더니 이처럼 양교 출신이 득세하다보니 타학교 출신들이 알게 모르게 받는 불이익 또한 적지 않다. 아마추어 시절엔 몸값(스카우트비)산정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프로가 된 뒤엔 연봉산정은 물론 지도자가 되고 싶을 때 음양으로 추천받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신생팀이 창단되거나 감독이 한명 경질된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곧바로 작전 개시. 의리로 똘똘 뭉친 사나이들이 뛴다. 선·후배 중 한명을 새 감독으로 밀려는 인사운동이 전개되는 것이다. 감독선임권을 가진 동문 고위층에 선을 대는가 하면 경쟁후보에 대한 악평을 흘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학연으로 얽힌 패밀리간의 대결. 대부분 학맥 싸움이 최후의 승자를 가리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모양이다. 농구판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도전과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학맥과 학벌을 파괴하려는 희망의 소리다. 그런 점에서 LG세이커스 농구단이 진행중인 실험은 더욱 관심을 모은다. 로열코스를 거치지도 않고 주류는 더더욱 아닌 ‘잡초형 지도자’ 김태환 감독을 사령탑에 앉힌 게 시발점이다.

1971년 동대문상고를 졸업하고 초중교 지도자, 심판을 거쳐 국민은행, 중앙대 감독을 역임한 김 감독은 말하자면 비주류조차도 안 되는 농구계의 민초 출신이다. 잡초 설움이 얼마나 심했으면 나이 마흔이 넘어서 중앙대 대학원을 수료했을까. LG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연세, 고려, 중앙대 출신 지도자를 제쳐놓고 중앙대 감독인 그를 발탁해 잔잔한 화제를 낳았던 게 지난 5월의 일. 송도고-고려대-현대전자를 거치며 ‘슛도사’로 명성을 날린 이충희 감독을 경질한 뒤 단행한 인사여서 김 감독의 프로입성은 극적인 인생 반전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주류의 아성을 깨기 위한 도전의 계절

(사진/김태환감독은 LG의 팀컬러를 잡초형 농구로 바꾸었다)
LG농구단의 역사를 안다면 더욱 뜻밖이었다. 96년 고려대를 연고팀으로 지명, 창단한 팀. 그래서 초대감독도 고려대 출신 이충희를 모셔왔다. 주축선수도 물론 양희승, 박재헌, 박규현 등 고려대 출신들이었다. 국가대표를 역임하고 좋은 대학을 나온 수많은 감독후보를 제치고 고졸의 김 감독을 선택한 데는 모험에 가까운 용단이 필요했다. LG농구단 김인양 단장의 얘기다. “승부의 세계인 프로에는 학력과 명성보다는 승부사가 제일이다. 우리는 그의 잡초 같은 승부사기질을 높이 사서 적임자로 선택했다.”

대학물도 먹지 않고 프로경력은 물론 국가대표경력도 없는 김태환 감독. LG가 그를 선택한 것처럼 그 또한 지금 주류의 아성을 깨기 위한 도전을 진행중에 있다. 첫 번째로 팀에 짙게 깔린 고려대 색깔을 하나둘 탈색했다. 양희승을 현대에 주고 명지대 출신 조성원을 데려온 데 이어 고려대를 나온 박훈근을 김 감독이 중앙대 감독 시절 지도한 적이 있는 동양의 조우현(중앙대 졸)과 맞바꿔 팀을 개편했다. 포인트 가드 오성식은 SBS에서 데려왔으니 용병 2명이 포함된 지금의 LG 베스트5는 전혀 다른 팀으로 바뀐 셈. 자기식 농구를 펼치기 위해서였다. 반면 동양오리온스는 기존 주전인 고려대 92학번 김병철, 전희철에 고려대 출신 박훈근이 가세함으로써 ‘고려대 색깔’이 더욱 확연해졌다. 지난해 조동현(연세대 졸)은 연세대 출신 서장훈이 주축을 이룬 SK나이츠로 옮겨갔고, SK는 고려대 출신 현주엽을 대신 골드뱅크에 내주었다. 연세대 출신 정재근이 지난 시즌 부진 끝에 현대 걸리버스(연세대 주축)로 옮긴 것도 학맥에 따른 이동과 우연찮게(?) 맥이 닿는다.

김태환 감독의 실험은 정규리그 초반이긴 하지만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충희식 ‘수비농구’를 잡초형 공격농구로 팀컬러를 바꾼 결과 지난 시즌 7위 팀이 일약 무시 못할 강호로 부상하고 있다. 트레이드마다 관련된 학연을 외면하고 오직 실력과 용도에 따라 선수를 선택한 게 팀성적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조성원을 데려온 이유도 프로농구 출범 뒤 학벌보다 실력으로 가장 상품성을 끌어올린 선수라는 사실에 매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봉도 팀내최다인 1억7천만원을 주는 데 앞장섰다.

학벌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하는 풍토를 위해

김 감독은 요즘도 가방줄 짧고 프로경력이 일천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시즌 경기테이프를 몇번씩 돌려보는가 하면 농구서적을 옆에 끼고 새로운 전술개발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그가 나이 쉰에 초보프로감독이 된 동기도 프로코트가 ‘학벌’이 아닌 실력으로 말할 수 있는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제 학벌이 좋지 않아 남보다 고통을 수십배 받았어요. 성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보고 지금도 초·중학교에서 어린 선수를 가르치는 이름없는 지도자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김 감독의 희망사항이다.

지난달에 있었던 여자농구 삼성생명의 새 감독 선임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태균 전임감독이 미국유학을 떠나자 빈자리를 놓고 전현직 지도자 13명이 줄을 섰다. 상당수가 연고대 출신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낙점을 받은 이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한빛은행 감독으로 있던 유수종씨가 자리를 옮긴 것이다. 여자농구의 명문 삼성생명이 고려대 출신 조승연-정태균으로 이어온 사령탑에 경희대 출신의 유 감독을 앉힌 것은 파격이었다. 학연보다 시드니올림픽에서 여자농구팀을 4강에 올린 유 감독의 지도력을 높이 사서 결정한 인사였다. 줄서지 않은 유 감독은 누가 추천했는지도 몰랐다. 학연을 배제하고 실력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프로는 실력으로 말한다.

권부원/ 경향신문 체육부 기자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