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의 주말농장]
글 · 사진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농장의 쉼터나 주차장 주변의 노는 땅엔 온갖 풀들이 가득하다. 지난 주말에 가서 보니 농장 관리인이 제초제를 뿌렸는지, 쉼터의 가장자리에 난 풀들은 노랗게 말라죽어 가고 있었다. 풀이 농장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게다. 애써 키우는 작물들이 아니니, 그것들은 ‘잡초’라고 불린다. 하지만 나는 ‘잡초’라는 표현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들도 먹을 수 있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먹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농장에 갈 때마다 쉼터에 자란 키 작은 풀들을 관찰하면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때마다 나는 작은 풀꽃들의 아름다움에 취하곤 한다. 꽃잎의 지름이 1mm밖에 안 되는 연보랏빛 꽃마리, 정말 별처럼 생긴 별꽃, 주름풀·개불알풀·점나도나물의 꽃은 보면 볼수록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한다. 그것들은 돋보기를 들이대야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작지만, 큰 꽃들의 화려함과는 다른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누가 내게 무슨 꽃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제 주저 없이 ‘봄맞이꽃’(사진)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하나의 풀꽃만이 아니다. 풀밭은 누군가 공들여 조경을 해놓은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냉이꽃이 하얗게 땅을 덮으면, 그 옆으로 노란 꽃다지가 군락을 이뤄 색깔을 맞춘다. 잎이 커가는 질경이는 관엽식물로 손색이 없다. 노란 민들레와 보랏빛 제비꽃도 곳곳에 고개를 내밀고, 메꽃 덩굴은 철쭉을 감아오른다. 신이 만들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한 정원이 나올 리 없다. 어릴 적에는 정말 들풀과 어울려 놀곤 했다. 쇠비름의 줄기로 눈 위아래를 벌려 개구리처럼 눈을 부라려 뜨는 장난질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질경이 꽃대를 잘라 누구 것이 질긴가 겨루고, 억새풀잎으로는 풀화살을 만들어 쏘았으며, 갈댓잎으로는 배를 만들어 강물에 띄웠다. 봄이면 찔레순을 잘라먹고, 겨울이면 닥나무 껍질을 벗겨 팽이채를 만들던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나이 들어 풀밭에 가보니 이름을 모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는 것들이라고 해도, 대개 사전에는 없고 고향 마을에서만 통하던 것이어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일산으로 이사온 5년 전부터 도감을 사들고 풀밭을 돌고, 사진을 찍다가 아는 사람에게 물어 하나둘씩 이름을 익혔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풀과 나무는 어느 정도 이름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름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감의 회복일 것이다. 네잎클로버를 직접 찾아보고, 꽃으로 시계를 만들어보지 않고서 클로버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나는 아이들이 오이처럼 생긴 괭이밥의 시큼한 열매, 진달래꽃을 맛보고 자라기를 바란다. 사귀다보면, 마음이 통하게 되면, 이름은 저절로 궁금해지는 법이다. “나 서른 다섯살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자랐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다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안도현의 시 ‘애기똥풀’은 반성이라기보다는 진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애기똥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시인에게 엄청나게 실망했었다.

하나하나의 풀꽃만이 아니다. 풀밭은 누군가 공들여 조경을 해놓은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냉이꽃이 하얗게 땅을 덮으면, 그 옆으로 노란 꽃다지가 군락을 이뤄 색깔을 맞춘다. 잎이 커가는 질경이는 관엽식물로 손색이 없다. 노란 민들레와 보랏빛 제비꽃도 곳곳에 고개를 내밀고, 메꽃 덩굴은 철쭉을 감아오른다. 신이 만들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한 정원이 나올 리 없다. 어릴 적에는 정말 들풀과 어울려 놀곤 했다. 쇠비름의 줄기로 눈 위아래를 벌려 개구리처럼 눈을 부라려 뜨는 장난질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질경이 꽃대를 잘라 누구 것이 질긴가 겨루고, 억새풀잎으로는 풀화살을 만들어 쏘았으며, 갈댓잎으로는 배를 만들어 강물에 띄웠다. 봄이면 찔레순을 잘라먹고, 겨울이면 닥나무 껍질을 벗겨 팽이채를 만들던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나이 들어 풀밭에 가보니 이름을 모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는 것들이라고 해도, 대개 사전에는 없고 고향 마을에서만 통하던 것이어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일산으로 이사온 5년 전부터 도감을 사들고 풀밭을 돌고, 사진을 찍다가 아는 사람에게 물어 하나둘씩 이름을 익혔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풀과 나무는 어느 정도 이름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름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감의 회복일 것이다. 네잎클로버를 직접 찾아보고, 꽃으로 시계를 만들어보지 않고서 클로버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나는 아이들이 오이처럼 생긴 괭이밥의 시큼한 열매, 진달래꽃을 맛보고 자라기를 바란다. 사귀다보면, 마음이 통하게 되면, 이름은 저절로 궁금해지는 법이다. “나 서른 다섯살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자랐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다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안도현의 시 ‘애기똥풀’은 반성이라기보다는 진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애기똥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시인에게 엄청나게 실망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