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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연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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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5-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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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이 만난 세상]

겸/ 10대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게이로서 게이 커뮤니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꽃처럼 유약한 미소년이거나 근육질 육체의 마초여야 한다. 게이의 성문화를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인간적인 관계보다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바쁜 게이 커뮤니티는 외모에 대한 차별이 헤테로 문화보다 훨씬 심각하다. 접선을 시도하는 게이의 대화를 보면 설명은 훨씬 간단한데, 가령 인터넷 게이 커뮤니티에서 ‘소개 부탁’이라는 말은 ‘키·몸무게·나이·성향·이미지’를 공개하자는 말이다. 이는 서로가 찾고 있는 파트너를 간략한 대화로 확인하여 ‘하룻밤’을 기약하는 통성명의 의례이다. 물론 난 이런 문화를 윤리적으로 매도할 바에야 차라리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문제는 자기결정권이 오직 신체의 영역에만 몰입되어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하늘을 뒤덮은 도시 공간 안에서 우울증과 분열증과 대인기피증과 애정결핍증을 동시에 앓고 있는 현대인은 다양한 인간적 관계를 포기했다.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생산의 부속품이 돼버린 현대인은 정서적인 욕구와 성적 욕구를 충족할 만남을 갈구하지만, 진실된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저 ‘연애 만세!’만 외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사랑으로 충만한 우리의 가족주의 공동체는 붕괴된 지 오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상의 탈출구는 오직 연애뿐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양한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정서적·성적·물리적 욕구를 오직 연애로 충족하려 한다.


나는 요즘의 몸짱·얼짱 나아가 ‘연애 만세’의 시대가, 뻔한 외모지상주의보다는 근대의 국가·집단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오직 파편화된 개인만이 남은 시대의 현상이다. 사람들은 연애 파트너와의 관계를 위해 피트니스 클럽에서 몸을 다지고 각종 미용법을 터득해 시대가 요구하는 표준화된 미적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시대적인 미적 기준에 미달된 사람들은 가슴을 높이고 지방을 제거하고 눈을 찢고 콧대를 높이고 턱을 깎아 자신의 열등감을 적극적으로 극복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연애는 항상 실패한다. 몸을 가꾸고 얼굴을 아무리 성형해도 관계에 대해 무지한 현대인은 ‘연애 만세’는 물론 ‘애정 만세’도 불가능할뿐더러 ‘인생 만세’는 더더욱 불투명하다. 애초 쿨함에 경도되어 있는 현대인은 파트너와의 진실한 교감 자체가 쉽지 않다. 게다가 다양한 관계를 연애라는 단일한 관계에서 충족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변변찮은 연애 한번 못해본 내가 이런 글을 써도 될진 모르겠으나 여기에서 ‘우리’는 시대를 지칭한 동시에 ‘나’를 대변한다. 계속되는 관계의 실패 속에서 연애에 대한 환상만 부풀어 오르는 나의 고해성사 정도로 읽어준다면 좋겠다. 어쨌든 지금부터라도 다양한 만남과 관계 속에서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진 영화 같은 연애를 통해 애정 만세와 더불어 인생 만세를 실천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부터 먼저 돌아봐야 할 때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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