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드물게 만나는 원시적 남녀들이 좋다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서울 청담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스타일리시한 선배랑 밥을 먹고 있었다. 밥 한 그릇을 청국장에 비벼 순식간에 해치운 선배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에 소개팅한 남자 말이야. 나 밥 먹는 모습에 질린 모양이야. 나 그날 하루 종일 굶었거든. 너무 배가 고팠어. 원래 나도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는 음식을 잘 못 먹는 편인데, 그날만큼은 파스타도 빵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치운 거야. 그런데 나중에 다른 남자 동료한테 물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한테 조금도 관심 없는 거로 간주한다더라. 난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게걸스럽게 보였나?”
몇년 전, 취재차 기호학자이며 국제 매너 전문가인 어떤 남자랑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나로서는 그 남자를 통해 테이블 매너가 왜 중요한 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꽤 의미 있는 자리였다. 품격 있는 레스토랑에서 음식맛을 제대로 즐기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테이블 매너를 익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는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테이블 매너를 몰라 눈치 보는 상황이라면 음식맛을 음미할 틈도, 매력을 발산할 틈도 없다는 그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얘기지만, 최근에 나는 테이블 매너와는 담 쌓은 ‘교양머리’ 없는 남자들의 매력에 대해서 알게 됐다. 형식적으로 자로 잰 듯한 세련된 매너를 가졌지만 별로 맛있게 먹지 못하는 타입보다는 차라리 게걸스럽게 먹는 편이 낫다는 것이 내 평소 생각이었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장 때 동행했던 남자인데, 그 남자는 어디에서나 식사 때만 되면 김치나 김, 심지어 창난젓 같은 냄새나는 한국 음식을 펼쳐놓았다. 예전 같으면 ‘해외 여행지에서의 꼴불견 베스트 3위’ 안에 꼽을 만한 행동이었지만, 그 남자만큼은 왠지 밉지 않았다.
다음 남자는 더 심각했다. 그날 밤 그 남자는 무언가에 굉장히 절망하고 있었다. 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를 불러다 놓고는 와인을 한병 시켰다. 곱상하게 생긴 웨이터가 와인을 한병 들고 와, 주문한 와인이 맞는지 확인하고, 코르크를 따서 어느 분이 테스팅하겠냐고 물을 때였다. 그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하는 수 없이 웨이터가 내 잔에 와인을 조금 따르고는, 내가 한 모금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어떠십니까?” 하고 물을 찰나였다. 그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이런 것 좀 하지 마. 그냥 놓고 가라고.” 그 순간 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 뭔가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내가 정신없이 웃자 그 남자도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드물게 만나는 야성적인 남자들이 나는 좋다. 충분히 배우고 익혔지만 이성이나 교양만으로는 제 몸을 지배할 수 없는 남자들 말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왜 그런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읽은 내용인데, 나 역시 ‘식탁 위에 앉으면 한껏 먹어보자고 덤비는 여자가 매력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이종격투기 중계방송을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앞이 아니라, 식탁과 침대 위다. 마침 지금은 남녀가 함께 ‘허리띠’를 풀어놓고 꽃게살을 빨며 원시적인 기쁨을 누리기 좋은 때다. 그래서 난 이번 주말에 서해로 간다.










